올해 2회를 맞는 울주세계산악영화제(9월 21~25일)가 특별한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산을 주제로 한 4편의 단편 극영화 제작을 지원한 ‘울주 서밋 2017’이다.
푸른 산속에서 신인 감독들이 만든 독특한 이야기들. 판타지·스릴러·멜로 등 장르도 각양각색이다. 그 중 ‘산나물 처녀’의 김초희(42) 감독와 ‘뼈’를 만든 최진영(33) 감독, 두 여성 감독에게 이번 영화를 만든 이야기를 들었다.
'산나물 처녀' 김초희 감독, "일었다 스러지는 열정 그 뒤가 중요하다"
“동화나 설화를 무척 좋아한다.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는 체화된 서사라고 생각한다. 제목만 들어도 결말을 자연스레 떠올릴 만큼 강력한 힘이 있지 않나. 영화에서 이를 비틀어 활용하면, 상투성을 깰 수 있다고 봤다.”
-다른 행성에 온 순심(윤여정)이 지구의 달래(정유미)와 산나물을 캐다 사냥꾼에 쫓기는 사슴을 살려준다. 짝을 찾고 싶어 하는 둘에게 사슴은 “내부순환로를 타고 홍제천에 가서 하늘에서 내려온 남자 둘을 만나라”고 한다. 환상적인 이야기에 구체적 한국 지명이 불쑥 튀어나와 웃음을 빵빵 터뜨리던데.
“내부순환로 같은 말엔 한국 관객의 보편적 경험이 들어 있다. 실제 그 곳에 가본 사람이 있을 테니, 이게 극 안에서 의외성을 줄 것이라 기대했다. 판타지와 현실적 요소가 충돌하면서 오는 엉뚱한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이런 코미디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었나.
“시작은 지난해 봄이었다. 재래시장에서 캐온 나물을 다듬어 파는 80대 할머니를 보았다. 햇살이 참 좋은 날이었는데, 이 좋은 날씨와 할머니의 고단한 모습이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지더라. 당시 오랫동안 해 온 일을 그만 두려할 때였는데, 순간 할머니와 나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도 안하고 일만 오래 하다 에너지가 소진된 느낌이랄까. 그즈음 접한 울주 서밋 2017 공모 소식과 나물 팔던 할머니, 나의 상황, 동화를 향한 애정. 이것이 합쳐져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단편에선 잘 볼 수 없던 정유미·윤여정·안재홍 등 유명 배우가 출연한다. 홍상수 감독의 프로듀서로 오랫동안 일한 경력이 도움이 됐나.
“정유미와 윤여정은 일하면서 많이 친해진 배우다. 아마 내가 쉬고 있으니, 다시 빨리 영화 일을 시작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흔쾌히 도와줬을 테다. 이들에겐 사실 내 시나리오 내용이 중요하지 않았을 거다. 마음을 다해 고마워하고 있다.”
-프로듀서를 그만두고 연출을 시작하게 된 이유라면.
“늘 영화감독을 꿈꿨고 한 번도 그 꿈을 잊지 않았다. 동시에 영화는 여러 동료와 함께 만드는 작업이라는 믿음이 있다. 프로듀서로 일할 땐 좋은 영화를 세상에 나오게 하는 것 그 자체에 큰 보람을 느꼈다. 그러다 더 이상 그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시기가 오더라. 마치 내 영화를 만들어야 할 기회가 운명 같이 찾아온 것처럼.”
-‘산나물 처녀’에도 사랑의 열정이 사그라지는 순간이 등장한다.
“사랑뿐 아니라 삶의 여러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본다. 일이든 사랑이든 뜨겁게 불타오르는 시기는 한시적이다. 그러니 열정의 시기가 끝난 후 어떻게 살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 참 중요하다. 나도 순심처럼 과거와는 다른 것에 열중하며 살려고 한다. 요즘 폭발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할 얘기가 너무 많다. 연애가 시작되기 직전, 사랑의 확신을 가지고 ‘썸’을 타는 시기랄까. ‘영화 연출’하고 말이다. ‘감독 데뷔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도 없다. 너무 행복하다. 인생의 황금기다(웃음).”
'뼈' 최진영 감독, "고통스러운 역사를 환기하고 싶다"
35분짜리 단편 ‘뼈’는, 짧은 극에 제주 4·3사건이라는 묵직한 역사적 주제를 담는다. 극중 두 여자에게 산은 아픈 과거가 묻힌 곳이고, 두 남자에겐 가족을 찾기 위해 넘어가야 할 곳이었다.
흥미로운 건 극중 경찰도 악인으로 그리지 않은 점이다. 경찰과 농민으로 만난 둘 사이에 긴장이 흐르지만, 이내 음식을 나눠 먹으며 친해진다. “물론 당시 경찰은 국가 폭력을 대표하는 집단이다. 하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그들 역시 가족과 이웃을 잃은 피해자다. 4·3 사건이 제주도 공동체 전체를 파괴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 당시 제주도민의 어투를 살린 방언 대사도 눈길을 끈다. “제주 모슬포 출신인 배우 홍상표의 공이 컸다. 그가 중학교 때 제주 방언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웃음). 제주 방언을 세게 쓰면 알아들을 수 없지 않나. 이 영화에선 뭍사람이 자막 없이도 알아들을 정도로 사투리 대사를 수정해 나갔다.”
또 다른 울주서밋 2017 작품들
함께 산을 오르는 젊은 연인. 투덕거리며 옛 추억을 상기하는 두 사람 사이엔 비밀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알 듯 모를 듯한 아리송한 대화 속에 가슴 먹먹해지는 슬픈 사연이 절절히 전해진다. 아름답고 푸근한 산의 매력을 동력 삼아, 미스터리한 멜로드라마의 묘를 살린 작품.
한밤중, 함께 차를 타고 가던 두 형사가 사고로 한 소년을 치어 죽인다. 선배 형사 민준(서준영)은 아이를 묻고 뺑소니 치자는 기환(조용근)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자기 자식을 위해 다른 아이의 죽음을 눈 감을 수 있을까. 민준에게 닥친 윤리적 선택을 서늘한 스릴러로 풀어낸 작품.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