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는 사실만 기록 … 수업은 주입식 대신 토론으로

중앙일보

입력 2017.09.15 01:28

수정 2017.09.15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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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에 갇힌 건국 논쟁 ③ 화쟁의 교과서 만들자
1948년 건국론자와 1919년 건국론자가 건국 시점 등에 대해 합의할 수 있을까. 정치권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학계에서는 가능할까.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까지 건국 연속성을 연구한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 소장은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갈등이 10여 년이 될 만큼 길고, 상대방의 공격으로 인한 상처가 깊다는 이유에서다. 정진영(정치외교학) 경희대 부총장은 “학문적 토론이나 건전하고 합리적 대화가 안 되는 건 상대방을 배제하고 힘을 쥐겠다는 숨은 논리가 있어서다”고 말했다.
 
20여 년 동안 교과서 편찬·검정 업무를 맡아 본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관계자는 “교과서가 외부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상태에서 쓰여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치권이나 교육 관료가 압력을 가하지 말라고 하는 게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유발행체제로 교과서를 낼 수 없다면 교과서 내에서 사실과 의견·해석을 구분하고, 의견과 해석은 다양하게 담은 교과서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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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은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있는 ‘화쟁(和諍)’의 교과서다. 2006년 독일과 프랑스가 펴낸 공동의 역사교과서가 가능성을 보여준다. 두 나라는 1806년 나폴레옹의 베를린 입성부터 1940년 히틀러의 프랑스 점령까지 네 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다. 공동교과서를 연구한 한해정 박사는 “논란이 끝나지 않은 주제에 대해 교과서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균형 잡힌 다양한 사료를 주고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독일 ‘보이텔스바흐 합의’ 교육 교훈
다른 주장 있는 사건 논쟁 수업
교과서, 사실과 해석 명확히 구분
교사는 토론 원활하도록 중재 역할
균형 잡힌 다양한 참고 사료 제공
학생은 대화 통해 판단 능력 길러

교과서 개발만으론 부족하다. 수업 방식도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학교와 교사가 진영 간 갈등이 첨예한 사안을 회피하지 말고 이를 수업에 끌어들이는 방식의 수업이 가능하다. 이는 1976년 독일에서 시작한 ‘보이텔스바흐 합의’ 원칙을 따른다. 이 원칙은 ▶바람직한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특정 생각을 주입하지 않는다 ▶학문과 정치에서 논쟁적인 것은 수업도 논쟁적으로 한다 ▶학생들이 정치적인 상황과 자신의 관심 상황을 분석할 능력 등을 갖추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활용해 학교 수업을 바꾸는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단법인 징검다리교육공동체 강민정 상임이사는 “건국 논란 등도 이 원칙에 따라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건국은 1919년인가, 1948년인가’를 주제로 해 고교 한국사 수업을 한다고 하자. 현재 학교 수업은 교과서에 기술된 내용을 강의식으로 가르치는 데 그친다. 보이텔스바흐 원칙이 수업에 적용된다면 교사는 학생들에게 1919년 건국론, 1948년 건국론을 주장하는 신문 기사와 논문 등 자료를 학생에게 제시한다. 그런 다음 학생 스스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건국론의 입장을 택하게 한다. 교사는 같은 생각을 가진 그룹으로 학생을 묶은 뒤 같은 그룹 내에서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 다음 상반된 입장을 가진 양측이 각자의 입장을 세우고, 상대방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반론 절차를 밟는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 주장의 허점을 찾아내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면서 해당 주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강 이사는 “교과서는 학생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도와주는 참고자료 역할을, 교사는 원활한 토론을 진행하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 합의
독일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州)의 각 정치세력이 전후 좌우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보이텔스바흐라는 도시에 모여 합의한 교육의 원칙. 역사와 철학, 사회 등을 통합해 가르치는 시민교육 과목의 수업은 이 합의에 입각해 진행된다.
  
특별취재팀=강홍준·고정애·문병주·윤석만·안효성·최규진 기자 kang.hongj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