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km 거리 여정에서 방향 정확히 찾는 향유고래
지금까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 나비들의 머리 속에는 지구 자기장을 감지하는 자철석과 특별한 유전자가 있어 이걸로 방향을 찾는다. ‘유전자 내비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자철석을 이용해 대를 이어가며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덕분에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게 된 4세대 나비는 수명이 1~3대에 비해 10배나 길다. 겨울이 오면 한 번에 멕시코로 날아갈 수도 있다.
아주 특별한 재능 같지만 자연에는 이런 ‘체내 나침반’을 활용하는 생명체가 의외로 많다. 귀소 본능이 강해 전쟁 때 전서구로 많이 쓰였던 비둘기는 부리 둘레에 자철석을 갖고 있고, 송어는 머릿속에, 꿀벌은 뱃속에 가지고 있다. 알에서 태어난 후 바다로 나간 바다거북도 이걸 이용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정확하게 돌아오고, 향유고래 또한 뇌 속의 자철석을 이용해 매년 적도 근처로 가서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은 후 다시 원래 살던 남극과 북극으로 돌아간다. 제왕나비보다 10배나 먼 3만km나 되는 먼 여정인데도 정확하게 원하는 방향을 찾아간다.
생명의 역사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삶의 원리 중 하나는 살아가는 데 별 필요가 없는 걸 가지고 있다가는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몸이 무거워져 변화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하는 데다 에너지 낭비가 많아지는 까닭이다. 세상을 잘 사는 비결은 간단하다. 시대가 원하는 걸 재빨리 갖추고, 그러지 않는 걸 빨리 버려야 한다. 변화는 변명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많은 생명체가 ‘쇠(철)’를 몸 속에 갖고 있는 이유는 뭘까?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방향을 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향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우주가 생길 때부터 있었겠지만 동물이 방향을 인식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지구에 생명이 생겨나기 시작한 게 36억년 정도 되는데 지금으로부터 5억4000만여년 전에서야 비로소 방향을 인식하고 방향 감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왜 방향 인식이라는 게 없었을까? 눈이라는 게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가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움직일 수는 있는데 눈이 없으니 살아가는 건 운이었다. 이리저리 지나다니다가 먹을 게 걸리면 조금 더 살아갈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하면 사라져야 했다. 언제나 그렇듯 살아있음의 원리는 좀 더 나은 능력을 만들어 낸 쪽의 손을 들어주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연에 의지해야 했던 삶을 확률이 있는 가능성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한 생명들이 드디어 5억4000만여년 전 눈을 만들어 냈고 번성의 주역이 됐다. 주인공은 해파리의 조상이었다. 비록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을 구분하는 원시적인 것이었지만 효과는 대단했을 것이다. 밝을 때, 그러니까 해가 떠 있을 때는 물 속 깊은 곳으로 갔다가 이 밝음이 사라지면 물 표면 가까이 나올 수 있는 아주 단순한 눈이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을 노리는 포식자를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어서 생존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생존력 획기적으로 높인 눈의 탄생
혁신이 가진 특성 중의 하나는 혁신이 일반화될수록 경쟁이 이전보다 몇 배나 치열해진다는 점이다. 눈의 탄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상을 보게 된 생명체들의 삶은 곧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되었고, 생과 사는 누가 먼저 보느냐에서 좌우되는 일이 많아졌다. 당연히 더 나은 눈의 진화가 생존의 조건을 좌우하면서 눈은 진화의 아이콘이 됐다. 좋은 눈을 가질수록 생존의 우위를 가질 수 있어 그 시대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삼엽충은 눈다운 눈을 개발한 덕분에 3억년이나 번성할 수 있었다(우리 호모사피엔스는 출현한 지 겨우 20만년쯤 됐다!).
이뿐인가? 곤충은 4억년 전 독자적으로 겹눈을 개발한 덕분에 지금까지 100만종 이상의 다양성을 만들어내며 여전히 번성하고 있고, 한 시대를 군림했던 공룡은 최초로 쌍안시를 만든 주인공이었다. 쌍안시란 지금 우리처럼 두 눈이 정면에 있어 시야가 겹치는 것을 말한다. 카메라의 화소가 겹쳐질수록 화질이 선명해지듯 시야가 겹치게 되면 대상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거리 또한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3차원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눈은 진화의 증거이자 생명체의 핵심 역량
생명의 역사에서 왜 눈이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까?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고, 여기에는 눈만큼 효과적인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은 항상 진화의 증거였고 번성한 생명체의 핵심 역량이었다.
우리의 뇌에는 방향을 담당하는 두 곳이 있다. 뇌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해마와 그 주변 신경세포가 그곳인데, 각각 내가 지금 어떤 공간, 어느 곳에 있는지와 지금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판단한다. 전자는 우리 몸 곳곳에서 보내는 감각 정보를 모두 모아 일종의 정신적 지도를 만든다. 정보에는 등급이 있어서 눈에서 보내는 신호를 가장 우선하고 그 다음으로 후각·동작 순으로 우선 순위를 부여한다. 우리가 시각을 가장 우선적인 감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 뇌의 3분의 1 가량을 시각중추가 차지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이렇게 작성된 정보를 토대로 나침반 역할을 하는 후자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판단한다. 이 두 기능이 본능으로 장착돼 있다는 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올바른 상황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이 둘에 하나가 더 필요하다. 기억이다. 기억이 있어야 어떤 장소, 어떤 상황을 떠올려 지금 내가 있는 곳과 비교해, 이 곳이 어디이고, 어떤 곳인지 판단할 수 있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과 연결시킬 수 있다. ‘처음 와 보는 곳’이라는 판단이 내려지면 몸에 긴장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언젠가 와 본 곳인데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면 경계 수위를 낮춘다.
알츠하이머 치매로 사망한 이들의 뇌를 보면 왜 기억이 중요한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기억을 담당하는 측두엽과 두정엽, 전두엽 피질 같은 부위가 특히 심하게 쪼그라들어 있다. 이렇게 많은 기억이 사라지다 보니 이런 사람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당연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아무 데나 돌아다닌다. 치매 환자들이 외출했다가 집을 제대로 찾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대로 살아가려면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하고, 지금 어디에 있으며, 이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잘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는 살아있는 인간들로 구성된 조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무조건 ‘나를 따르라’ ‘열심히 하자’고 하는 리더들이 있다. 예전에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갈수록 먹히질 않는다. 아니 강조할수록 다들 슬슬 뒷걸음질치며 머뭇거리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우리 안에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 오래된 본능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니 자기도 모르게 가능성이 더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보여줄 수 없다면 설득력 떨어져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갈수록 이런 말을 하는 리더가 많아지고 있다. 방향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서 생존이 엇갈리는 이 시대가 리더들에게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내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향 탐색과 제시에 미흡한 리더일수록 속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주어진 방향에서 오로지 ‘열심히, 더 열심히’라는 속도만을 최선으로 여기고 살아온 탓이다.
이제 시대는 5억4000만년 전의 세상살이가 그랬듯 더 밝은 눈을 가진 이들이 더 잘 살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쪽이 이기는 상황이 됐다. 방향이 있어야 속도가 제 기능을 하고, 조금 늦게 가더라도 제대로 가는 게 필요한 시대가 됐다. ‘빨리’도 중요하지만 ‘제대로’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 “열심히 하자” “최선을 다 하자”는 말은 이제 리더가 강조해야 할 말이 아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적절한 방향을 제시하면 강조하지 않아도 구성원들이 스스로 알아서 열심히 하는 시대가 된 까닭이다. 가야 할 곳도 모른 채 일단 달려보자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달리는 만큼 제대로 된 삶에서 멀어지게 되고, 멀어지는 만큼 빨리 사라지기 때문이다..
[박스기사] 그들의 꿈은 모두 ‘바깥’에 있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