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세도 당당한 코끼리가 자신을 묶은 밧줄을 끊듯이, 그대는 애정의 얽매임을 끊고서 왕위도 버리고 출가했다. 늙은 왕이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서 숲으로 가는 건 놀랍지 않다. 그러나 한창 쾌락에 젖어들 나이에 왕궁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떠나온 그대는 참으로 놀랍다. 이 높은 가르침을 담기에 적합한 그릇이다. 지혜의 배를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라.”
알라라 칼라마는 처음 본 싯다르타를 ‘코끼리’에 비유했다. 그것도 ‘밧줄을 끊는 코끼리’였다. 그런 코끼리에게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단지 재가의 삶을 뛰쳐나오는 힘이 아니다. 머리를 깎느냐, 깎지 않느냐를 가르는 힘도 아니다. 그건 나에게 너무도 익숙한 ‘에고의 눈’‘자기 중심의 눈’을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이다. 그런 ‘눈’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자신을 묶은 밧줄이 끊긴다. 알라라 칼라마는 젊은 싯다르타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보았다.
이 대목을 읽다가 나는 적잖이 놀랐다. 이 구절은 산스크리트어로 ‘마하 프라즈나 파라미타(maha-prajna-paramita)’이다. 이 산스크리트어 발음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이다. ‘마하’는 ‘거대한’이란 뜻이고, ‘반야’는 ‘깨달음의 지혜’, ‘바라밀’은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다’는 의미다.
왜 그럴까. 우리는 생겨난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식이든, 일이든, 돈이든, 명예든, 욕망이든,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든 말이다. 우리는 영원하길 바란다. 그러나 생겨난 모든 것은 때가 되면 무너진다. 그래서 생로병사가 있다. 싯다르타가 출가한 까닭도 여기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알라라 칼라마는 당시 120세였다. 열 여섯 살 때 출가해 무려 104년째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300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러니 상당한 규모의 수행 그룹이었다. 신입 수행자를 받을 때는 시험도 치렀다. 싯다르타에게는 그걸 면제해 주었다. 알라라 칼라마가 싯다르타에게서 ‘특별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알라라 칼라마의 제자가 됐다. 그리고 수행에 매진했다.
100년이 흐르자 둘 사이에 차이가 생겼다. 산 속에서 고립돼 있던 수행그룹은 옛날 방식의 계율을 그대로 고집하고 있었고, 대도시의 수행 그룹은 대중과 소통하며 시대에 맞게끔 계율을 바꾸어 갔다. 그런데 산 속의 수행자들이 바이샬리로 내려왔다가 깜짝 놀랐다. 그들의 눈에 바이샬리의 불교는 더 이상 불교가 아니었다. ‘붓다의 전통’에서 한참 어긋나 있다고 봤다.
반면 바이샬리 승려들의 눈에는 산 속 불교가 이상했다. 그들은 대중과 소통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옛것’을 지키는 일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결국 산 속 불교는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ㆍ테라바다) 불교’가 되고, 도시의 불교는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ㆍ마하삼기카) 불교’가 됐다. 둘은 그렇게 갈라졌다.
더 훗날 대중부 불교는 간다라지역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의 ‘대승불교’로 이어지고, 상좌부 불교는 인도 남쪽의 스리랑카를 걸쳐 동남아로 흘러가며 ‘소승불교’로 자리를 잡았다. 물론 대승과 소승을 나누는 것도 대승불교적 관점이긴 하다.
“알라라 칼라마가 믿음이 있듯이 나도 믿음이 있다. 그가 정진할 수 있듯이 나도 정진할 수 있다. 그가 지혜가 있듯이 나도 지혜가 있다. 그러니 알라라 칼라마만 ‘텅 빈 고요(무소유처정)’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싯다르타는 둘로 보지 않았다. 그는 스승을 우상화하지도 않았다. 똑같은 잠재력을 봤고, 똑같은 가능성을 봤다. 알라라 칼라마가 닿을 수 있다면, 자신도 닿을 수 있다고 여겼다. 거기에는 나와 상대, 상대와 나를 둘로 보지 않는 ‘불이(不二)의 시선’이 녹아 있다. 싯다르타는 알라라 칼라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에게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고리를 끊는 법을 알려주십시오.”
그러니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일만이 윤회가 아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배가 부르면 화장실에 가야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면 속이 비어진다. 그것이 바로 ‘Flow together’이다. 원인과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간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진정한 뜻은 ‘인과(因果)’다. 태어남이 씨앗(因)이라면 죽음은 결과(果)다. 싯다르타는 그 강고한 연결고리를 끊을 ‘칼’을 찾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열심히 수행했다. 결국 스승과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 알라라 칼라마도 한눈에 알아봤다. 싯다르타가 자신과 똑같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제안했다. 자신과 함께 이 수행그룹에 머물며 사람들을 가르치자고 했다.
싯다르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성취감보다 오히려 허전함을 느꼈다. 알라라 칼라마가 머무는 경지는 ‘고요’였다. 눈을 감고 명상에 몰입할 때 찾아오는 평화였다. 그 자리는 온통 비어있었다. 그래서 그 어떤 파도도 나를 칠 수가 없었다. 그러니 한없이 조용하고, 적적하고, 아늑했다.
그런데 눈을 뜨면 달랐다. 좀 전의 고요와 평화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일상의 소리, 생활의 파도, 삶의 고뇌가 자신을 때렸다. 그래서 알라라 칼라마를 따르는 수행자들은 자꾸 눈을 감으려고만 했다. 눈을 떠서 현실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눈 감았을 때의 그 아늑함 속에 계속 머물려고만 했다.
그것은 ‘절반의 실패’였다. 싯다르타는 거기서 한계를 절감했다. “눈을 떴을 때 생로병사의 고통이 여전하다면, 그건 문제를 푼 것이 아니다. 이 방식을 통해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두 번째 스승 알라라 칼라마를 떠났다. 싯다르타는 이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스승을 찾아서 걸음을 옮겼다. 나도 버스를 탔다.
바이샬리(인도)=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