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다운 시니컬한 비평이다. 이상적인 정치 모델로 일컬어지던 영국 대의제도의 실상을 꼬집은 것이다. 루소는 대의제도의 한계를 일찌감치 내다봤다. 그의 혜안은 오늘날 더 잘 들어맞는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렇다. 우리나라의 대의제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백약이 무효인 임종 상황에 몰렸다.
정당 실세만 바라보는 의원들의 현실 속 대의제
국회와 국민이 경쟁하며 완성하는 직접민주주의
사실 우리의 정치체제를 대의민주주의라 하기 남세스럽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이 국민 뜻을 대변해 국민 주권이 실현돼야 대의민주주의인 거다. 우리는 그냥 대의제일 뿐이다. 국민대표가 권력자 뜻만 받들어 국정을 농단하고 헌법을 유린하게 고무·방조한 거 아니었던가. 참다못한 국민이 촛불을 켜 들자 ‘앗 뜨거워라’ 대통령을 쫓아내고 다시 대선을 치렀지만 정작 자신들 임기는 3년이나 남았으니 아쉬울 게 없는 이 땅의 국민대표들 아니냔 말이다.
“잘못 뽑았다”고 후회한들 이미 늦었고 3년을 기다려 다른 사람을 뽑아봐야 달라질 것도 없다. 정당의 실세가 공천권을 틀어쥐고 국민의 선택권은 이를 추인하느냐 마느냐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런 국회의원이 누구에게 충성할지는 자명한 일이다. ‘친박연대’라는 노골적 이름의 정당이 생겨나고 실세를 거슬러 국민의 뜻을 좇다가 ‘배신자’로 몰려 공천 탈락하는 예를 본 게 먼 과거가 아니다. 그러고도 당 혁신위가 혁신의 일환이라며 버젓이 ‘전략공천’을 내세우는 게 이 나라 정당의 현실이다.
이미 말했지만 직접민주주의는 대의제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직접민주주의의 성공적 모델인 스위스 역시 법률안의 90%를 국회가 발의한다. 국회가 국민 의사에 반하는 법률을 만들 때 국민투표로 거부할 수 있고 국민이 요구하는 법률을 제정하지 않을 때 국민이 직접 발안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이런 장치가 국회에 더욱 책임감을 부여할 것이다. 국회와 국민이 선의의 경쟁자가 돼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다.
도시국가 운운하는 것도 시대착오다. 오늘날 유권자가 한자리에 모일 필요는 없다. 한 세기 전까지 상상도 못했던 정보기술(IT)이 온라인 광장과 온라인 투표를 자유롭게 한다. 국민과 경쟁하는 의원이나 정당이라면 최대한의 현안 정보를 제공하며 국민을 설득하려 나설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정치 개혁이다.
중우정치보다 더 무서운 건 민심을 거스르는 정치 엘리트들의 오만정치(傲慢政治)임을 우리는 경험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직접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예컨대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권을 규정한 헌법 128조 같은 전형적 플레비시트(plebiscite)를 없애야 한다. 유신헌법에서 ‘국민’을 ‘대통령’으로 바꾼 게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대표적인 악법 사례다. 원래의 주인인 국민에게 권한을 돌려줘야 한다.
루소가 직접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국민주권’은 참여에 의한 자유 확보로 실현된다. 국민주권의 실현을 위해 직접민주주의가 미래란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