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까다로운 기준을 두다 보니 평균 열댓 명의 심사위원들이 반나절에 걸쳐 기나긴 심사회의를 이어간다. 그렇게 16년간 이어져 온 영화제에 결정된 대상작은 단 네 편뿐. 그중 세 편이 ‘호러·판타지’ 장르에서 배출됐다는 점이 참 흥미롭다(1회 신재인 감독의 ‘재능 있는 소년 이준섭’(2002), 8회 조성희 감독의 ‘남매의 집’(2009), 11회 엄태화 감독의 ‘숲’(2012). 세 편 모두 어마무지하게 무섭다!).
최근 충무로에서야 조금 부침을 겪고 있다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호러는 항상 ‘뛰어난 신예’들이 ‘적은 예산’으로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어 낸 장르였다. 그렇다고 ‘신인들의 장편영화 등용문’이라고만 불리기엔 호러가 그리 호락호락한 장르가 아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1980),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1960)…. 세계 영화사의 걸작들을 꼽아보면 호러가 차지하는 지분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그의 요청에 응답한 감독들을 살펴보자. ‘텍사스 전기톱 학살’(1974)을 연출한 이 시리즈의 아버지 토브 후퍼 감독부터 미국 공포·판타지·SF 작가 러브 크래프트의 영원한 짝패 스튜어트 고든 감독, 로저 코먼을 승계한 ‘그렘린’(1984)의 조 단테 감독과 말이 필요 없는 아시아 대표 감독 미이케 다카시까지,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마스터즈오브 호러’(2005, Showtime)다.
에피소드가 열 세 편이나 되는 시리즈이다 보니 완성도가 들쭉날쭉할 만도 하건만, ‘마스터즈 오브 호러’는 거의 모든 에피소드가 기본 이상의 퀄리티를 보장한다. 아니, 기본이 뭐야. 웬만한 장편 호러영화보다 장르에 충실하면서도 각각의 독립된 테마 또한 놓치지 않고 만들어 낸 에피소드들이 수두룩하다(강호의 고수들이 모였으니, 말 안 해도 서로 ‘쪽팔리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았을까?).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이탈리아 지알로(Giallo·화려하고 자극적인 살인 장면이 특징인 이탈리아 공포영화 장르)의 대명사 다리오 아르젠토가 연출한 ‘제니퍼’다.
여자는 벙어리다. ‘아마도’ 제니퍼일 것이라 추측되는 이름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다. 곧 수사는 답보상태에 빠지고 오갈 곳 없어진 제니퍼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 얘길 들은 경찰은 다시금 공명심이라도 발동한 건지 정신병원으로 찾아가 제니퍼를 구해낸다. 자신이 데리고 있겠다며 보호자를 자처하는 경찰. 감동한 제니퍼가 그의 품에 안긴다. 그러자 그녀의 육감적인 신체가 그의 몸에 와 닿는다.
제니퍼는 세상에서 가장 흉한 얼굴과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몸매를 동시에 가진 여자다. 혹은 말 못 하는 동물에 가깝다. 낮에는 애완견과 같이 천진난만하지만 밤에는 이성이나 감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 듯 색(色)을 탐한다. 경찰도 결국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고 만 것이고.
하지만 제니퍼에게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제니퍼를 제니퍼답게,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건 바로 그녀의 식성이다. 제니퍼는 육식동물과 같은 입맛을 가졌다. 숨 쉬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살점과 내장을 뜯어먹어야 비로소 배가 부르다. 제니퍼의 모든 걸 알게 된 경찰은 점점 미쳐간다. 섹스는 행복하지만 제니퍼의 ‘끼니’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된다. 끝내 그는 제니퍼를 서커스단에 팔아버리기로 결심하는데….
대략의 줄거리에서도 충분히 느껴지듯, 제니퍼는 무척이나 야하고 잔혹한 영화다. 더불어 다리오 아르젠토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그림형제의 동화들처럼 고전적인 서글픔과 기묘함도 공존한다. ‘마스터즈 오브 호러’란 제목 그대로 ‘호러 장인’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달까.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까진 아니어도, 한여름 에어컨 바람만큼의 서늘함은 제공하고도 남는 훌륭한 소품이다.
글=한준희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