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분수대] 맘충에게 살충제를 뿌렸더니

중앙일보

입력 2017.08.30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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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요즘은 무슨 벌레가 그리 많은지. 맘충(어린 자녀 키우는 엄마)·급식충(급식 먹는 중·고등학생)·한남충(한국 남자)·틀딱충(틀니 사용할 정도의 노인)…. 징그럽고 세상 쓸모없다며 손가락질하는 걸로는 참을 수 없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며 벌레퇴치제를 여기저기 뿌려댄다. ‘노키즈존’은 맘충(엄마)과 유충(아이)을 동시에 내모는 강력한 퇴치제 중 하나다. 문제 있는 벌레 몇 마리만 골라내는 게 아니라 맘충과 유충이 발붙일 싹을 자르고 재생산 고리를 끊어 아예 개체 수를 줄인다는 점에서 때론 살충제 역할까지 한다.
 
노키즈존의 이 같은 뛰어난 효과가 알려지면서 벌레퇴치제의 쓰임새는 점점 늘어난다. 최근엔 노키즈존의 미투상품(성공한 제품을 그대로 따라 해 내놓는 상품)인 ‘노틴에이저존(No teenager zone)’까지 등장했다. 노키즈존은 효과가 좋긴 해도 사용할 때 맘충의 소음을 유발해 시끄럽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급식충을 겨냥한 노틴에이저존은 별반 시끄럽지도 않아 소리 소문 없이 널리 쓰이고 있다. 부산의 한 유명 커피전문점을 시작으로 PC방에서 서울 압구정동의 유명 버블티 카페에 이르기까지, 이러다간 노키즈존의 인기를 조만간 넘어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다. 벌레퇴치제 덕분에 효과적으로 벌레를 차단했다고 생각했는데 벌레가 줄기는커녕 점점 더 눈에 많이 띄니 말이다. 맘충이 안 보이니 급식충이, 급식충을 차단하니 틀딱충이 출몰하는 식이다. 게다가 메갈충(페미니스트 여자) 같은 전에 없던 신종 벌레까지 속속 생겨나니 그야말로 문 밖으로 발도 못 내밀 만큼 온통 벌레 세상이 돼버렸다. 그 많은 벌레를 다 피하려면 온갖 퇴치제를 뿌려대며 나 홀로 방 안에 앉아 있는 수밖에 없다. 어라,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벌레를 쫓았을 뿐인데 왜 내가 독방에 갇혀 있는 거지?”
 
한 세기 전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대상이 존재하기에 그렇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관점이 대상을 창조한다고 했다. 『언어인간학』에서 김성도 교수도 언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라며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만들어진다고 했다. 벌레로 가득 찬 세상은 그렇게 불리는 온갖 ‘충’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만든다는 얘기다.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