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대의 창설 목적은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인근까지 습격한 사건의 보복을 위한 북파공작원 양성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훈련 중 7명이 숨졌고 남은 24명은 가혹한 훈련과 부당한 대우에 반발해 1971년 8월 23일 부대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이탈했다. 이들은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들도 저지에 나선 군·경과 대치하면서 총격과 함께 수류탄이 터지면서 20명이 죽었다.
생포된 4명도 구속 사실이 가족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비공개로 열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2심 항소는 기각되었다. 1971년 12월 30일 사형이 확정되고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국방부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공작원들이 당국의 회유 때문에 상고(3심)를 제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교전 중 숨진 공작원 20명은 벽제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상태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2004년 영화 '실미도' 개봉과 함께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고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는 사건 조사와 함께 이들 유해를 2005년 발굴했다.
사형이 집행된 4명의 유해는 가족에게 인계되지 않은 채 매장되었고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상태다. 4명 중 유가족이 동의한 고 김창구·이서천 씨는 위패를 만들어 봉안했다. 고 김병염·임성빈 씨의 유족들은 명예회복과 시신발굴이 급선무이며 순리라고 주장하며 위패봉안을 반대해 이날 봉안식에서 빈자리로 남았다.
봉안식에서 만난 유가족 김복열(75)씨는 고 김봉용씨의 형이다. 충북 옥천 출신인 고 김봉용씨는 고향친구·후배 7명과 함께 실미도 부대원이 되었다가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이들은 '한 3년 군에서 고생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지원했다고 형인 김복열 씨가 전했다. 김 씨는 취업이 어렵던 시절에 당시 20대 초반에 불과했던 이들에게는 큰 유혹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중앙일보에는 다음날 내용이 바뀌었지만 전날 오후에 이미 '군 특수범'으로 정정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중앙일보는 석간신문이었기에 다음날 기사를 쓸 수 밖에 없었다.
1971년 8월 24일자 1면에 쓰인 기사내용이다.
『대간첨대책본부는 난동사건이 나자 23일 하오 3시 "인천 송도에 북괴무장공비 20여명이 상륙,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 이르러 군경의 저지를 받아 16명이 자폭했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정래혁 국방장관은 하오 6시 35분 "이 사건은 서해의 공군 관리하의 특수범들의 집단 난동사건"이라고 번복 발표했다.』
1971년 8월 25일자 1면에는 국회 국방위에서 의원들이 질의한 내용을 싣고 있다.
아래는 그 기사 내용이다.
『▶조일환 의원(신민당) 질의 = 특수범들이 섬을 탈출해서 서울에 침입할 때까지 7시간 40분동안 경비진은 뭘했는가. 도대체 무장공비로 발표했다가 특수범의 소행으로 정정 발표한 것은 국제적 망신이다.
▷정래혁 국방장관 답변 = 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다. 실미도에서 사건이 발발한지 7시간이 넘도록 이를 몰랐던 것은 폭도들이 섬의 무전시설을 맨 먼저 파괴했기 때문이며 무장간첩으로 오인했던 것은 현장을 볼 때까지는 이들의 행동이 너무 대담하고 공비의 소행같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기 때문에 잘못 판단한 것이다. 특수범들의 관리에 문젯점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나 전연 외출 외박을 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상현 의원(신민당) 질의 = 섬의 무전시설을 정기적으로 점검했더라면 미리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정 장관은 인천상륙 후 4차 방어가 1시55분이라면서 또 자신이 이 보고를 들은 시각이 1시 55분쯤이라 했는데 왜 보고가 이렇게 늦은가.
▷정 국방 답변 = 이 섬의 무전은 하루 몇 차레 정규 '체크'하도록 되어 있어 아침부터 교신이 안되었으나 부차적 통신방법이 없었고 종전에도 몇 차례 고장난 일이 있어서 항공정찰도 안했다. 정부가 공비로 잘못 발표했다가 솔직이 시인하고 다시 정정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공비소행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대방동 현장에 출동한 수도경비사 소속 모 대위가 아직 꿈틀거리는 생존자에게 권총을 난사해서 숨지게 했다는데 알고 있는가.
▶김수한 의원(신민당) 질의 = 막는다는 사람들이 난동 '버스'의 번호와 차종도 모르고 무얼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경찰기동타격대는 몇 시에 정보를 받아 출동했으며 군과의 연락은 어떻게 했나. 생존한 김종철 소위가 기자들에게 한 말로는 61년에 소위로 임관되어 군번까지 있는 군장교가 아닌가.
▷정 국방 답변 = 그날 하오2시쯤 합참의장으로 부터 난동자들이 공군관리하의 특수범일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고 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현장확인이 중요했다. 그래서 현장으로 달려가 공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곧 청와대에 보고했다.
발표가 늦은 것은 문구를 수정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모부대 대위가 생존자에게 권총을 난사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이며 조사 후 밝히겠다. 현장출동이 늦은 것은 사실이며 그 이유는 비공개회의에서 밝히겠다. 생존한 김종철은 장교로 임관된 사실도 없으며 군인이 아니다. 공항입구를 차단한 일은 있으나 공항을 폐쇄한 일은 없다.
▶조윤형 의원(신민당) 질의 = 실미도와의 통신두절 경위를 밝히라.
▷김두만 공군참모총장 답변 = 하오 2시쯤 소사에 무장공비가 출현했다는 보고를 들었고 조금후 이들이 송도에서 배를 타고 온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때 직감적으로 느껴진 것이 실미도여서 '체크'하라고 했더니 교신이 안된다고 보고 들었다. 즉시 관계자가 '헬리콥터'로 현장을 확인토록 했으며 국방부로 연락했으나 장관이 없어 합참의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 했다. 자세한 시간은 비공개회의에서 밝히겠다.
▶김수한 의원(신민당) 질의 = 장관은 아침부터 교신이 안됐다고 하고 총장은 2시반에 안됐다고 했는데 어느 쪽이 맞는가.
▷김 참모총장 답변 = 실미도와의 교신은 우리와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오류동 통신소를 거치며 2시반 '체크'를 했더니 아침부터 안된다고 했다.
▷김재명 대간첩대책본부장 답변 = 사건 당일 괴한이 범선을 타고 상륙했다. 20여명의 무장공비가 군·경과 교전중이라는 보고를 들었다. 뒤이어 이들이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방면으로 질주하면서 무차별 사격을 가해 검문 경관을 사살했다는 보고를 듣고 공비가 아니면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자 자폭했다는 보고를 받고 무장공비라고 생각했으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일념으로 빨리한다고 한 것이 그렇게 됐다.
▷오치성 내무장관 답변 = 노량진서 방위과장 인솔로 처음 출동한 15명의 기동타격대는 특수범이 탈취한 차량의 종류와 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난동 '버스'가 통과한 순간이어서 위협사격만 했다. 경찰은 23일 하오1시쯤 경기영2-3612호 '택시'운전사가 동인천서에 신고, 처음 알았으나 단순한 접촉사고로 신고됐다. 이어 하오 1시 10분쯤 민간인이 인천서 보안과에 신고하여 즉시 기동타격대를 출동시켰고 25분에는 도경에 보고, 도경은 부평서·33사단과 치안국에 연락했다.
▶채문식 의원(신민당) 질의 = 사건 당일 장관은 하오 2시 40분에 현장에 나가 사태를 본 결과 공비가 아닌 것을 알았다고 했는데 3시 10분 대간첩 대책본부가 공비의 침투로 발표한 것을 보면 미리부터 간첩의 소행으로 속이려던 것이 아닌가.
▷정 장관 답변 = 대 간첩작전은 간첩대책본부가 24시간 보고를 접수해서 지휘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난동자 중 도망자는 1명도 없으며 실종된 실미도의 경비병 중 2명의 시체가 발견되어 사망 경비병은 14명으로 늘어났다. 난동자들을 완전 파악하기 전에 공비로 발표한 것은 억지로 간첩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고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해야겠다는 긴급성에서 나온 것이다.
'버스'내의 폭발은 난동자들이 여러 곳에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수류탄의 안전 '핀'을 뽑아들고 있다가 '버스'가 가로수에 충돌하는 바람에 4, 5발이 터진 것으로 보인다.』
2006년 7월 13일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05.5~07.12)는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를 한 뒤 다음과 같이 권고사항을 발표했다.
- 관계당국과 공군의 반성과 사과표명.
- 공군참모총장 명의 공식 사망통보.
- 탈출 중 사망한 20명의 유해 적절한 처리.
- 사형당한 4명의 유해 발굴 지속.
- 국방부와 공군은 실미도 공작원에 대한 부당한 대우 인권침해 행위 등 책임 통감.
이날 봉안소에 안치된 실미도 공작원은 다음과 같다.
실미도 공작원 시신 발굴 20명 : 고 김기정·김봉용·김용환·김종철·박기수·박원식·박응찬·심보길·윤석도·이광용·이명구·이영수·임기태·장명기·장선광·장정길·전균·전영관·정기성·정은성 씨
실미도 공작원 시신 미발굴 4명 : 고 김병염·김창구·이서천·임성빈 씨
봉안식이 진행되면서 일부 유가족이 오열했다. 유골함을 붙들고 오열했고 실미도 부대원을 촬영한 단체사진을 만지며 울었다. 봉안식이 열리기 전 마련된 제사상에는 밥을 퍼 놓은 커다란 그릇이 놓여졌다. 좁은 제사상에 24명의 밥그릇을 놓기 어려워 커다란 그릇에 밥을 준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