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후보는 당 대표 출마 선언에서 극중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보통 ‘극좌’나 ‘극우’에 대해 말씀들을 많이 하신다. 그렇지만 반면에는 ‘극중’이 있습니다. 정말로 치열하게, 좌우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실제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에 매진하는 것, ‘중도’를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는 것, 그것이 바로 ‘극중주의’입니다.”
정치·경제 양극화 배경으로
20세기 말 생긴 정치 이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도 표방
좌우를 초월하는 정책 추구
특정 정치인의 미래가 어떻게 되건 극중주의는 생명력을 발휘할 것이다. ‘족보’가 있는 개념이다. 일단 영국의 명품 경제지인 이코노미스트가 극중주의를 표방한다. 2013년 이코노미스트는 창립 170주년을 맞아 ‘이코노미스트가 스스로를 설명하다: 이코노미스트는 좌익인가 우익인가. 둘 다 아니다. 우리는 극중(radical centre)이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좌파·우파 정당들의 노선을 떠나 자유시장경제, 평등, 인류의 전진을 추구한다는 게 요지다.
극중주의는 20세기 말에 생긴 정치철학이자 이념이다. 세계 민주주의 담론에서 가장 뜨거운 소재의 하나다. 극중주의 탄생의 배경은 정치 양극화와 경제 양극화다. 정당들의 노선이 극단적으로 흐른다. 타협을 모른다. 21세기 ‘극좌’ ‘극우’는 20세기 스탈린의 ‘극좌’나 히틀러의 ‘극우’와는 다르다. 하지만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민주주의를 위협하기는 마찬가지다. 상위 1%, 10%가 너무 많이 차지하는 경제 양극화는 민주주의뿐 아니라 시장경제를 위협한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은 극단적 해결을 요구한다. 그래서 단순한 중도가 아니라 ‘극단적인 중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당위성이 생긴다.
극중주의는 좌파·우파의 정책적 연원을 따지지 않는다. 좌우 정책을 결합했을 때 모순이 발생한다고 보지 않는다. 예컨대 복지와 성장은 충돌하지 않는다. 미국 정치에서 항상 논란인 ‘작은 정부’ vs ‘큰 정부’ 대결도 별 의미가 없다. 이렇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국가·정부는 복지에 전념한다. 필요하면 공공부문 종사자 수를 늘린다. 동시에 기업에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 성장을 도우면 된다.
한국 정치에 극중주의는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두 가지 모델이 있다. 제3당 창당을 통한 집권이라는 마크롱 모델이 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극중주의는 150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자유당을 기반으로 삼았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극중주의를 ‘진정한 진보주의(True Progressivism)’라고도 부른다. 용어는 포장일 뿐 내용물이 중요하다.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정책만 봐서는 이미 극중주의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은 아닌가’. 이념 토론이 네거티브 설전보다 바람직하다. 정책은 이념에서 나온다. 정치에서 힐난은 언제 사라질까.
김환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