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사적인 공간은 도저히 보여줄 만한 게 없고 실제로 작업도 집이나 작업실이 아닌 근처 카페나 도서관에서 한다는 주장을 흔쾌히 받아들여, 권씨 인터뷰는 그 대신 맥주도 파는 서울 상암동의 한 '책맥' 서점에서 이뤄졌다. 숨만 쉬어도 진땀이 나는 7월 중순 무더운 날이었다. 마침 권씨 책이 돋보이는 자리에 진열돼 있길래 물었다.
-저런 걸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한강 소설보다도 위에 꽂혀 있는데.
"(심드렁한 말투로) 내가 점점 유명작가가 되어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나날이 유명해질 수가 있지? 유명했다가도 잊히고 하는 건데. 미미하지만 계속해서 유명해지고 있구나, 그런 생각?"
그러니까 성장성이다. 계속해서 물었다.
-길 가다가 아니면 식당 같은 데서 알아보는 사람도 있나.
"합정역 근처에 가끔 가는 술집이 있는데 거기 오는 젊은 사람들이 어쩌다 아는 척을 한다."
역시 술이다. 지난해 단편집 『안녕 주정뱅이』를 내면서 만천하에 애주가로 '커밍아웃'했지만(페이스북에서 동료 문인들의 음주 러브콜이 이어졌고, 9월 열린 독자 대상 북콘서트의 이름이 '주정당 창단 선포식'이었다) 그의 소설 속 음주 장면은 역사가 깊다. 음주의 강도와 술자리 해프닝의 치열함을 기준으로 권씨의 모든 작품을 재배치하는 게 가능할 정도다. 그럴 만큼 그의 소설에서는 웬만해서는 술 마시는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등단작인 1996년 상상문학상 수상 장편 『푸르른 틈새』부터 그렇다. '가투'에 나가기 전 항상 막걸리 한 잔 걸쳐야 하는 파리한 운동권 여학생이 나온다. 2012년 장편 『레가토』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운동권 리더 박인하가 2년 후배 오정연을 자신의 자췻방에서 성폭행한 것도 어쩌면 순전히 술 때문이다. 2004년 첫 소설집 『처녀치마』 이후 권씨가 펴낸 모두 5권의 소설집 표제작(소설집 제목과 같은 제목의 수록 단편)들을 음주라는 관점에서 얘기해볼 수도 있다.
지난해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로 반향 일으킨 소설가 권여선
"대학 4학년 때 가장 친했던 친구 한강에 투신 자살…가장 괴로워"
인간 치부 까발리는 신랄한 소설 쓰다 2, 3년 전부터 변화 모색
"항상 멀쩡한 사람 존경스럽다" 하루 마시고 이틀 쉬는 퐁당당 음주
지난해 『안녕 주정뱅이』는 결정판. 수록된 7편 모두에 음주장면이 있다.
-쓸 때도 마시나.
"쓸 때는 안 마신다. 그건 안 된다. 커피 마시며 쓴다. 오늘 좀 썼다, 싶으면 스스로에게 보상은 한다. 집에 가서 마신다."
-『안녕 주정뱅이』에는 모든 작품에 술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작품들을 모으고 나니 예외 없이 그렇더라. 그래도 일관성이 있지 않나. 술꾼 독자들을 붙잡는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얼마나 자주 마시나.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매일 먹는 시기가 있었다. 뜻한 바 있어 퐁당퐁당 격일제 음주를 하다 그것도 힘들어진 다음부터는 퐁당당 퐁당당 하루 마시고 이틀 쉰다."
-좋아하는 주종은.
"소주인데, 이제는 운명이 됐다. 스스로 취한 정도를 소주로 가늠하기 때문에 중간에 갑자기 위스키나 와인을 마셔버리면,"
-음주량 조절에 실패하나.
"조절에 실패한다. 항상 낭패를 본다. 소주로 쭉 계산해야 아, 내가 얼마 만큼 먹었으니까 이제 필름이 끊기기 시작하겠구나, 여기서 더 마시면 넘어지겠구나…."
-술 마시려면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관리 비결이 있나.
"특별히 없다.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그냥 잠을 많이 잔다. 해장에는 무조건 잠이다. 열여섯 시간씩 잘 때도 있다. 자고 나서 좀 괜찮아지면 살살 몸을 달래는 거지."
"첫 번째로 젊을 때부터 쭉 마셔왔기 때문에 이제는 술에 의존적이 되서 그냥 술이 먹고 싶다. 그 물질이 그냥 들어왔으면 좋겠는 거다. 두 번째는, 사람이 시간을 보내는 게 제일 힘든 거라고 생각하는데 술을 마시면 시간을 매우 많이 잡아 먹는다."
-보내기 힘든 시간을 술먹는 시간이 잡아먹어준다?
"그렇다. 인생을 되게 짧게 살 수 있는 거다. 나는 긴 시간을 깨어 있는 상태로 보내는 사람을 굉장히 존경한다. 그러니까 내게는 깜빡 죽어주는 시간이 필요한데, 술을 먹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 내일 오후까지는 아무 것도 안 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이 생기는 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술은 시간을 뭉턱뭉턱 잘라 먹는다. 착착착."
이런 발언은 아무리 공감이 가더라도 공식적으로는 놀라운 척해야 한다. 그저 삶은 견디는 것이고, 뭔가 결단을 내리지 못해 산다는 이야기로까지 들린다.
무엇보다, 반복은 지옥이기 때문에 망각이 필요한데 작은 죽음인 만취 후 망각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 게 해준다, 권씨 발언의 바탕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지 싶은데, 유심히 살펴보면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출판사를 문학동네로 바꿔 출판한 2007년 『푸르른 틈새』에는 평론가 정여울이 진행한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과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묻자 권씨는 이렇게 답한다.
삶에 대한 지독한 권태가 인생의 어떤 시기 환멸 체험과 관련 있다면 권씨가 말하는 '못 견디겠는 삶'을 좀 진부하긴 하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죽지 못한 자의 부끄러움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 스스로 『레가토』부터, 2014년 장편 『토우의 집』이 본격적인 변화의 분기점이라고 했지만, 그 전까지 그의 소설에서 두드러졌던 어떤 집요함이나 신랄함, 대개의 경우 감추고 싶어하기 마련인 인간 내면의 치부까지 낱낱이 까발기는 결벽 역시 그런 꽃시절의 참담한 경험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권여선의 견디는 삶을 보며,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최소한의 삶, 극단적인 인생을 바라보며 독자들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럴 것 같다. 그렇다면 권여선은?
"소설을 쓸 때 제일 싫으면서도 작가가 되길 잘했다, 하는 생각도 가장 많이 한다. 소설 쓰기는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콩알 만한 우주를 만들어내는 거다. 조금씩 그걸 만드는 게 너무너무 재미있으면서 너무너무 싫다. 쓸 '꺼리'가 있다고 써지는 게 아니다. 어떻게 써야 할지 아무 생각이 안 난다. 맨땅에 헤딩하는 거다. 그래서 괴로운데, 괴로워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마감은 해야 하니까 징징징징 울면서 마감을 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가장 강하게 하게 된다. 이게 살아 있는 거구나, 그래서 다른 작가도 그렇겠지만 약을 못 끊듯 소설을 쓰는 거구나."
쓰기의 반복이 지겨워지지 않는 이상 작가 권여선이 우리 곁을 떠날 일은 없을 것 같다. 다행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항상 맨땅에 헤딩해야 한다고 하지 않나.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