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은 레드 라인 아니다” 말 바꾼 오바마=레드 라인의 유혹에 넘어간 정상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2012년 8월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부가 화학무기 사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당국의 보고를 받은 오바마 전 대통령은 참모들과 주말 내내 마라톤 전략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러시아 같은 제3국 중재자를 통해 알아사드 정부에 경고를 보내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화학무기를 이동시키거나 사용하는 것이 레드 라인”이라며 “이런 일이 생기면 나의 계산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원고에 없던 발언이었다. 뉴욕 타임스(NYT)는 “전략회의에 참석했던 일부 참모들은 ‘대체 어디서 레드 라인이 튀어나온 것이냐’며 놀랐다. 당초 계획은 알아사드 정부에게 겁을 주는 것이지, 대통령이 어떤 행동에 얽매이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보도했다.
최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도 레드 라인을 꺼내들었다. 지난달 홍콩 반환 20주년 기념식에서 “중앙 권력에 대한 도전과 홍콩을 이용해 중국 본토를 파괴하려는 행위는 모두 레드 라인을 넘는 것으로, 절대 용인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겠다”는 모호하게, “하지 마라”는 구체적으로 해야=레드라인을 설정하면 상대방이 넘을 경우 상응하는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그 간 북한의 계속된 도발에도 정부는 레드 라인이나 '게임 체인저', '강을 건너다' 등의 표현을 공식적으로는 피했다. 그런 선을 대통령이 직접 그어 버린 것이다. 17일 오후 외교부 정례브리핑에서 레드 라인과 관련한 질문이 쏟아지자 조준혁 대변인은 “대통령 말씀 외에 덧붙일 것은 없다”는 답만 도돌이표처럼 반복했다.
북핵 문제에서 레드 라인 설정은 처음도 아니다. 98년 북한이 탄도미사일 대포동 1호를 시험발사한 뒤 당시 윌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조정관이 작성한 보고서에 이미 레드 라인이 등장한다.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또 발사하거나 제네바 합의를 위반하는 핵 개발을 할 경우 이를 사실상의 레드 라인으로 받아들이고 대북 포용 정책에서 봉쇄 정책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 레드 라인을 거침 없이 넘었다. 지금처럼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고도화한 상황에서 레드 라인을 긋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미 외교안보전문 매체 디플로매트의 앤킷 판다 선임에디터는 18일 “문 대통령이 정말 북한의 ICBM 무기화를 레드 라인이라고 한 것이라면, 북한은 이미 그 라인을 넘었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올 1월 신년사에서 ICBM 개발을 이야기했을 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6개월 뒤 그런 일은 일어났고,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레드 라인은 통상 이를 넘으면 비무력적 방법에서 무력적 방법으로 해결 방식이 바뀌는 것을 뜻한다. 문 대통령이 이를 의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호전적 행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단호함을 보이려한 것 같은데, 공개 석상에서 이렇게 너무 자세한 부분까지 언급을 하면 실수가 나와 본말이 전도될 수 있다"며 "최고 지도자의 메시지가 갖는 무게감이 있기 때문에 실수라 해도 고치기가 힘들다”고 했다.
레드 라인은 ‘어디에 긋느냐’보다는 ‘어떻게 긋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행동을 억제하는 효과가 결정된다. 미 전략사령부 산하 전략자문단 정책소위원회가 1995년 작성한 보고서(‘포스트 냉전 시대 억제의 핵심’)에는 ^상대방이 선을 넘을 경우 우리가 할 대응은 모호하게 규정하되 ^그 결과가 매우 끔찍할 것임은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상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지목하되 ^허용되는 행동이 어디까지인지는 밝히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공포의 본질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느 선을 넘을 경우 우리가 비이성적이거나 통제 불가의 대응을 할 수도 있다고 의심하게 만드는 데 있다”는 설명이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