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준비할수록 상처 … 20대 ‘자절남’ 마음의 병 40% 급증

중앙일보

입력 2017.08.17 01:09

수정 2017.08.17 02:13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위기의 ‘취준남’ <상>
“여자 동기들은 대부분 취업했다. 후배들도 하나둘 취업한다. 토익·자격증 등을 준비하느라 아르바이트도 못하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있다. 언젠가부터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나는…대한민국 ‘취준남(취업 준비하는 남자)’이다.”
 
청년 취업난에 20대 후반 취준남들의 신음 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청년실업률이 2000년대 이후 최고인 9.8%를 기록하면서 여성보다 사회 진출 시기가 늦은 남성들의 압박감이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취업 스트레스는 20대 남녀 모두의 문제지만 20대 후반 남성들은 녹록지 않은 현실을 호소한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생 김모(26)씨는 “여자인 친구들은 거의 모두 직장에 다닌다. 마음 터놓을 수 있는 건 비슷한 처지의 남자들뿐이다. 요즘엔 누가 더 불행한지 한탄하기 바쁘다”고 말했다.

“여자 동기·후배들 먼저 취업하는데
부모님께 손 벌리는 나 찌질해보여”
“남자가 생계 책임” 풍토도 부담
20대 후반 남성, 상대적 압박감 커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대학생 윤모(27)씨는 “수험 생활 3년간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떨어지면 또 손을 벌려야 한다. 염치없는 아들이 된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토로했다. 대학생 이모(26)씨는 “또래 여자 친구들은 아직 학생인 나를 애 취급하고, 함께 대학에 다니는 여자 후배들은 나를 ‘화석’이라 부른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내 처지가 ‘찌질이’ 같다”고 말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최근 취준생 76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취준생의 88.4%는 “자존감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나 자신’을 꼽은 이들이 59.3%로 가장 많았다.
 
이런 현상이 최근 20대 남성들의 ‘마음의 병’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10년 1만5773명이었던 20대 남성 우울증 환자 수는 2015년 2만2186명으로 40% 증가했다. 같은 기간 3만127명에서 2만9545명으로 약 1.7% 감소한 20대 여성과 대비된다.


이에 대해 최정원 국립정신건강센터 소아청소년정신과 과장은 “인생에 대한 고민을 던지고 답을 찾는, 소위 ‘철이 드는’ 시기가 남성에게 더 늦게 찾아온다. 레이스가 늦은 20대 후반 남성이 더 곤혹스러워하는 이유다”고 분석했다.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연된 사춘기’를 겪는 20대 후반 남성들은 자아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훈련 없이 취업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 중심주의가 잔존한 한국에는 ‘남성은 이래야 한다’는 기준이 높은데, 그런 편견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 스스로 고통을 겪는다. 남성 중심 사회의 두 얼굴이다”고 지적했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는 남성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성역할 인식과 사회적 기대가 있다. 정작 준비가 안 된 취준남들은 압박감으로 인해 고통받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자괴감 자체가 남성 중심적 관점이라는 분석도 있다. 취업 적령기를 넘긴 ‘취준녀’들은 남성들보다 더 삭막한 ‘취업 절벽’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지난 11일 발표한 ‘7월 고용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20대 고용률은 여성이 60.7%로 20대 남성(57.6%)보다 3.1%포인트 높지만 30대는 남성이 90.6%인 반면 여성은 59.5%에 머물렀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남성 정규직 종사자 비율은 61.5%였고 여성은 38.5%였다.
 
“교육과정 바꿔 취준생 여유 찾게 해줘야”
 
송인한 교수는 “우리 교육과정이 스스로 고민하면서 자기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갖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정원 과장은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고 소신껏 살 수 있을 때 취준남이 느끼는 외로움이나 괴로움이 사라질 수 있다. 단순 수치에 의존하는 채용 현실을 탈피해야 20대 남성들이 창조적으로 공부하고 경험을 쌓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