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당시 언론 등 각종 기록을 통해 나타나는 ‘해방 공간’은 이 같은 인식과 적잖은 거리가 있다. “이승만 박사는 맥아더 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 1주년 식전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에 내방하라고 초청하였다” (1949년 7월 29일 자 경향신문 1면)는 보도가 대표적이다.
당시 주요 인사들의 언행을 따라가 봤다.
①백범 김구 등 임정 요인들=해방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도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인식했다는 정황이 적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은 1946년 12월 8일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했다. 건국 과정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한 단체였다. 1948년 3월 1일엔 ‘良心建國(양심건국)’이라는 휘호를 쓰는가 하면 정부가 수립되고 4개월가량 지난 그해 12월엔 ‘건국기념사업회’라는 단체를 발족하고 고문을 맡았다.
③해방공간 사회 단체들=1946년 6월 19일 열린 전국부인대표대회에서는 이승만·김구 등 대표적 독립운동 인사를 초청해 열린 결의대회였다. 전북 대표로 참석한 한 참가자는 “건국운동에 분골쇄신해 이 박사와 김구 주석의 뒤를 받들겠다”고 말했다. 8·15 이후 결성된 사회단체 중에서는 1949년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조선건국청년회를 비롯해 ‘건국’을 내건 단체들이 적지 않았다.
또 신문에서는 김구가 머무른 경교장을 찾아와 ‘건국성금’을 기탁했다는 기사가 종종 실리곤 했다.
일각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8년 취임 당시 ‘대한민국 30년’을 강조했던 것과 1919년 임정 시절에 일왕에게 보낸 건국 통보문을 근거로 당시 초대 정부가 건국 시점을 1919년으로 상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 한 연구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임정을 앞세운 것은 남북 분단은 물론 백범 등 일부 세력이 제헌의회에 불참했던 대내외적 갈등 속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일왕에게 보낸 건국통보문은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부당성을 지적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제헌 의회에 이승만 계열이 많이 참여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독립운동 세력들 중에서 임시정부에 지분이 없었던 좌익계는 ‘건국’에 방점을 뒀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에 ‘건국절’ 논쟁은 한 쪽의 손을 쉽게 들어올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여당은 문 대통령의 ‘1919년 건국’에 동조한다. 그러나 불과 19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에 ‘건국 50주년’을 크게 기념했을 때에도 동조했었다. 야당은 문 대통령이 ‘1919년 건국 원년’을 주장하는 이유가 임기 중 건국 100주년 행사를 하려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1948년 건국’을 강조한 정치적 배경이 진보의 반발을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이 때문에 이번 논쟁을 두고 “정치권 모두가 패배자가 됐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과거 일본강점기 하에서 모든 것을 걸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열사들은 해방 후 70년이 지난 뒤 조국에서 이런 논쟁으로 국론이 분열되리라는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당시 자신들이 논쟁했던 걸 70년 후손들도 되풀이하리라는 걸 예상했을까.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