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외주 제작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EBS가 독립제작자들을 착취하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박환성 PD가 지난달 15일 남아공에서 EBS 다큐 촬영 중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관심이 집중됐다. 지난 10일 정부에서도 올해 11월까지 지상파와 종편 4개사, CJ E&M 등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실태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외주 제작 의무 편성 비율이 정해지며 외주 제도가 도입된 건 1991년. 질 좋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지만 27년이 지난 지금, 외주 제작 제도는 목적을 잊은 채 왜곡돼 있다.
프로그램 질 높이려 91년 도입된 외주 제도
27년 지난 현재 방송사 비용 절감 수단으로 전락
독립제작자가 따낸 협찬비, 지원금, 상금 가져가
"피해자는 시청자, 외주 정책 개편 시급"
독립제작자들은 방송사가 제시하는 제작비가 턱없이 낮다고 주장한다. EBS '다큐프라임-야수의 방주(2부작)' 제작을 위해 박환성·김광일 PD가 EBS로부터 받은 제작비는 1억4000만원이었다. 송규학 한국독립PD협회장은 "맹수를 찍어야 하는 자연물 치고는 턱없이 부족한 제작비다. 자체 제작할 땐 보통 7~8억원에서 최대 10억원까지 제작비를 책정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부족한 제작비에 협찬 따와도 뺏겨
EBS의 경우 독립제작자가 협찬 혹은 정부기관 지원금을 따올 경우 각각 금액의 40%, 20%를 가져간다. 나머지 방송사는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KBS·SBS 관계자는 "프로그램에 따라 나누는 비율이 다 다르다. 협찬비를 일부 나누는 건 맞다"고 말했다. 독립제작자들은 "나머지 방송사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말한다. 최근 KBS의 교양 프로그램 제작을 맡았다는 한 독립PD는 "계약서에 비밀유지조항이 강조돼 구체적 수치를 말할 순 없지만 협찬비 대부분을 가져간다고 계약서에 명시돼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상금도 가져간다. 독립PD C씨는 한 소수민족의 풍습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 한 재단이 주최하는 시상식에서 상금 1000여만원을 받았지만 절반 가까이 방송사가 가져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제제기조차 섣불리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방송사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MBN PD로부터 한 독립PD가 폭행 당한 사건이 있었다. 최선영 이화여대 특임교수(에코크리에이티브협동과정 대학원)가 당시 작성한 사례집에 따르면 방송사 PD의 강요로 메인작가의 하이힐에 술을 받아 먹거나, 폭언·폭행 당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송출만 해줘도 저작권 갖는 방송사
2009년 이례적으로 KBS가 저작권을 양보한 사례가 있다. KBS 대기획 '인간의 땅' 5부작 중 방글라데시의 폐선박 해체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철까마귀(Iron Crows·박봉남 감독)'다. 박봉남 감독은 방송 후 촬영 원본을 재편집해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IDFA)에 출품했고, 2009년 한국 다큐멘터리 최초로 중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그래픽노블로까지 출판되며 다양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방송사에 저작권이 있었다면 이게 가능했을까.
영국에서 독립PD로 활동 중인 장정훈 PD는 "영국 BBC도 2003년 법 개정(Communication Act)을 통해 방송사는 제작비 제공 대가로 3~5년 사용권만 행사하고 그 기간에도 저작권 자체는 창작자에게 양도하고 있다"며 "이후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고 영국방송물의 수출 또한 급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BBC는 제작비도 프로그램 장르, 방영 채널, 내용 등 여러 요소별로 물가상승률을 고려해 매년 표준제작비를 공개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한 지상파 관계자는 "영국은 방송 시장이 영미 문화권 전체기 때문에 한국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방송사 수익이 줄면서 외주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제작비를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최선영 교수는 "의무편성비율만 정하고 있는 외주 정책을 전면 개편해 당초 목적에 맞도록 질적인 측면에서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를 방치하면 프로그램의 질 하락으로 피해는 결국 시청자가 보게 된다"고 말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