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시민’이나 ‘로마의 시민’처럼 서양사에서는 고대와 중세로부터 정치참여의 권리를 가진 주민들을 시민이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왕이나 황제가 군림하며 통치하던 왕조시대의 주민은 신민(臣民)이나 백성으로 불렸다.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은 시민의 참여로 공화정을 선포하면서 주민들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며 동시에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이 된 근대정치의 전환점이 됐다.
국민·시민을 동의어로 느끼는 것
한국 정치의 혼란·혼선의 원인
광장 열기, 국가운영 동력 되려면
대의제와 정치복원이 선결과제
새 정부, 개헌 등 정치개혁 힘써야
지난가을부터 올여름까지 우리는 어려웠던 헌정 위기를 넘어왔다. 그 과정에서 헌법을 준수하며 그 궤도를 충실히 따라가면 민주공화국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은 시민의 적극적 참여의식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1987년 권위주의 시대로부터의 민주화 과정이나 이번 대통령 탄핵과 대선 과정은 우리의 시민문화가 한층 성숙했음을 증명했다. 혁명이나 쿠데타가 아닌,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헌법 절차를 따른 통치권 변화는 최장집 교수의 표현대로 ‘한국 민주주의 공고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성공의 뒤를 따라다니는 실패의 함정을 조심해야만 한다. 이번 헌정 위기의 극복 과정에선 수많은 국민의 애국심과 정의감이 그들을 시민화시켰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다수 국민의 시민화가 자동적으로 안정된 민주정치의 제도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촛불로 상징되는 시민의 정치력이 국가운영의 권력으로 변용되기 위해서는 헌법이 제시하는 민주적 정치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야 한다. 수많은 국민의 시민화로 이룩한 광장의 열기를 이번에는 시민동력의 국민화로 국회의사당에 연결시켜야 하는 것이다. 민주국가에서는 헌법에 명시된 대표성의 원칙을 우회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국민 중심의 의회민주주의를 우회하고 싶은 충동과 유혹을 과감히 자제할 때 시민의 개혁 의지가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정치의 복원’ 없이는 민주국가는 있을 수 없다.
사실 많은 국민이 ‘한국 정치 이대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국회와 정당에 대한 불신을 표출한 지 이미 오래다. 지난해 4·13총선에서도 그러한 국민적 정치 불신은 확연히 나타났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이 아무런 대책 없이 머뭇거리다 보니 정치의 파탄은 필연적이었다. 그로 말미암은 국가적 위기를 국민의 성숙된 법치주의와 시민정치문화의 힘으로 일단 넘겼으니 이제는 지체 없이 우리의 의회민주주의를 보완해 새롭게 출발시키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새 대통령과 정부가 당면한 긴급한 과제가 산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가 제대로 살려면 무엇보다 민주정치가 작동해야 한다. 국민대표성과 국정책임성의 작동이 보장되는 정치 개혁, 특히 열 달 후로 다가온 헌법 개정 국민투표와 선거법 및 정당법 개정을 제대로 마무리 지어 국민의 시민화와 시민의 국민화가 한국 정치문화에서 순환적으로 작동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