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누구보다 증세의 무서움을 잘 안다. 그가 대선 내내 증세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한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실상 분배의 다른 이름인 ‘소득 주도 성장’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재원 조달에 대해 물으면 에둘러 피해갔다. 3% 정도였던 재정 지출 증가율을 7%로 늘리겠다, 아동·청년·노인 수당 등에 178조원의 돈을 추가로 쓰겠다고 했지만 ‘어떻게’는 내놓지 않았다. 당시 대선 캠프 인사는 “답은 증세밖에 없다”며 하지만 “섣불리 증세를 말했다가 화를 부를 수 있다”며 입을 다물었다. “집권 후 차근차근 전략을 세우기로 가닥을 잡았다”는 것이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적어도 올해는 세율 인상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한 것도 정권의 그런 생각을 읽고 정무적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효율 해치지 않는 분배
명품 좌파만 할 수 있다
그래도 계산이 잘 안 맞는다. 부자 증세로는 고작(?) 연 4조원 정도 세수를 늘릴 뿐이다. 178조원의 공약 재원 마련은 물론 ‘중(中)부담-중(中)복지’로 가기에도 많이 부족하다. 자칫 심각한 조세 저항을 부를 수 있다. 이미 종부세 때 익히 경험한 바다. 명예니 존경이니 이름 붙여봐야 헛일이다. 원치 않는 세금을 내면서 그런 사탕 발림에 누가 넘어가겠나. 부자의 세금만 명예롭고 존경받아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금액은 적어도 중산층의 세금이 더 명예로울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상상을 하게 된다. 혹시 ‘국민 증세’로 가는 수순이 아닐까. 중부담 중복지엔 국민 증세가 필수다. 부자 먼저 세금을 물리면 중산층 설득이 쉬워진다. 국민 증세야말로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대통령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문 대통령은 최저임금 인상, 탈원전, 비정규직 철폐 등 분배의 외연을 넓히고 국민 부담을 늘리는 정책들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이런 정책들은 인센티브 효과를 왜곡시켜 효율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효율을 희생시켜 평등과 분배를 이뤄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명품 좌파라면 한걸음 더 나가야 한다. 효율을 덜 희생시키면서 분배를 강화하는 방안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공정한 국민 증세가 그중 하나다.
다음주면 새 정부의 첫 세제 개편안이 발표된다. 여기에 ‘국민 증세’ 방안이 꼭 담겨 있기 바란다. 5년 후 무지막지한 청구서가 날아올 텐데, 아무 대책도 없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