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쓴 김영태 선생 고희 기념 헌정 글 ‘그래도 그 둘은 많이 닮았다’ 중 한 부분이다. 프랑스 고답파의 창시자 테오필 고티에와 예술관과 취미가 닮아도 너무 닮았기에 둘의 공통점을 짚었었다. 올해로 작고 10주기를 맞아 추모 전시회 ‘초개와의 동행’이 열렸다(7월 11~23일 갤러리 류가헌).
몸의 언어 남기고 간 김영태
미들 굽의 여자 구두와 날씬한 지팡이가 잘 어울리는 보헤미안, 담배와 커피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풍류객. 무용가의 영감을 자극하는 시를 썼고, 자서전적 평을 했다. 69년부터 기력이 남아 있던 마지막 순간까지 거의 150장에 달하는 무용 평을 매일 썼다. 수많은 무용 공연의 홍보물에 소묘와 캘리그래피를 남겼으며, 어쩌다 무대에 올라 춤꾼의 파트너를 자청하기도 했다. 100여 편이 넘는 피아노 그림만큼 토슈즈와 발레리나 소묘도 그렸다.
무용계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진 지도 어언 10년.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낮춰 부른 ‘초개(보잘것없는 지푸라기)’가 무색할 정도로 많은 무용인이 그의 부재를 그리움으로 채운다. 꿈틀거리듯 빠른 손놀림으로 특색을 잡아내는 소묘 한 편을 바라보며 자화상에 담긴 것과 똑같은 생전의 미소를 떠올린다. 무용가도 아니면서 무용 공연에 그처럼 많은 흔적을 남긴 이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 같다.
장인주 무용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