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동안 세계 반도체 시장이 역성장한 것은 딱 두 번밖에 없다. 2008년과 2012년이다. 그때마다 삼성전자의 움직임은 특이했다. 2008년 리먼 사태가 덮치면서 반도체 시장은 22%나 쪼그라들었다. 그해 4분기, 삼성전자는 충격적인 7400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하지만 2009년 신년 연휴에 삼성전자 이윤우 대표가 조용히 승지원을 찾아 이건희 회장을 만나고 돌아왔다. 그리고 2월 18일, 느닷없이 “초격차 전략”을 선포했다. 예상을 뒤엎는 공격적인 투자가 이어졌다. 그해 독일 반도체업체 키몬다는 파산했다. 삼성은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아 11조원의 영업이익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달랑 두 문장의 삼성 보도자료
지난 10년간 과감한 결단으로
세계 1위로 우뚝 올라섰지만
총수 부재의 위기 속에
5~10년 뒤가 두려운 분위기
반도체는 생산 라인 하나 까는 데 15조원의 돈과 2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삼성 반도체 기적은 오너의 과감한 결단, 미래전략실의 효율적인 컨트롤타워 기능, 그리고 계열사의 자율 경영이란 삼박자가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지금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은 경영 부재 중이고, 미래전략실은 해체됐다.
2년 전 반도체 시장조사기관인 IHS는 “D램 시장 규모는 2015년 486억 달러→2016년 442억 달러→2017년 441억 달러로 쪼그라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지금 IHS의 D램 시장 전망은 완전 딴판이다. “클라우딩과 데이터 센터, 사물인터넷이 급속히 커져 2017년에 1038억 달러, 2018년에는 1070억 달러로 팽창할 것이다.” 불과 2년 만에 천당과 지옥을 오갈 만큼 반도체 시장은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이 부회장의 1심 재판은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당초 “증거가 차고 넘친다”는 특검의 자신감은 무너져 버렸다. 재판부는 뇌물죄의 ‘스모킹 건’이라던 안종범 전 경제수석의 수첩을 직접증거가 아닌 정황증거로만 받아들였다. 수첩의 증거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다. 이렇게 재판이 결정적인 증거 없이 양쪽의 지루한 공방전으로 흐르면서 특검이 무리하게 구속기소를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다.
삼성전자는 세계 1위에 올라섰지만 “앞으로 언제까지 정상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우울한 분위기다. D램은 나노 기술로 얼마나 미세한 회로를 만들지, 낸드 플래시는 적층 기술을 이용해 얼마나 많이 쌓는지에 따라 경쟁력이 결판난다. 속도와 시간의 싸움인 것이다. 반도체 다음의 바이오와 자동차 전장(電裝) 같은 신수종 사업은 더하다. 수많은 실패를 무릅써야 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사운을 건 오너들의 고독하고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지난 10년간 오너 일가의 결단이 삼성전자를 오늘날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올려놓았다. 앞으로 5~10년 후가 문제다. 삼성은 “이 부회장이 없어도 실적이 좋지 않으냐”는 오해에 답답해하고 있다. 지난 1분기 영업이익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간신히 10조원을 밑도는 9조9000억원으로 맞췄다. 이번 2분기 세계 최고 기업에 우뚝 서고도 달랑 두 문장의 보도자료만 내놓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세계 1위 삼성전자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이철호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