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환율 53배 넘는 암달러의 힘
파탄 난 민생경제에 산소호흡기
김일성대 교수도 ‘하우스 푸어’
시간당 1달러 과외 나서기도
“월급만으론 못살아’ 풍조 만연
김정은의 ‘허리띠’ 약속은 공수표
첫 번째 비밀은 북한 특유의 이중환율 제도에 있다. 북한은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고려호텔이나 주요 외화상점·쇼핑몰에서 1달러당 150원 정도의 공식 환율을 게시한다. 이대로라면 광복거리상업중심에서 팔리는 화장품 세트는 2434달러, 커피믹스는 483달러에 달한다. 북한 돈 306만7900원인 전기자전거는 무려 2만452달러다. 웬만한 소형 자동차 값에 맞먹는다. 공식 환율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달러 한 번 손에 쥐어 보지 못하는 대부분의 북한 민초들은 어떻게 먹고사느냐는 점이다. 북한 전문매체인 데일리NK가 11일 밝힌 평양의 쌀값은 1㎏당 5800원. 한 달 월급으로 쌀 500g밖에 살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 대목에서 북한 주민의 민생을 살리는 두 번째 비밀코드가 작동한다. 바로 시장, 즉 장마당 경제다. 일부 특수계층을 제외하면 식량은 물론 부족한 생필품 대부분은 장마당에 의존한다. 상당수 주민은 물품을 구입하던 소비자에서 벗어나 직접 장사에 뛰어들고 있다. 노동당과 행정조직의 사무원이나 공장·기업소 노동자로 일하는 경우 부부 중 한 사람은 장마당에 나가 국수를 말아 파는 등의 장사를 한다. “월급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런 현상은 인텔리 계층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김일성대 출신 탈북인사는 “2000여 명의 김일성대 교수 가운데 부부가 교수인 경우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꽤나 수준 있는 교수·교원의 부인도 장마당에 나간다”고 말했다. 정무원(내각) 국장급 대우를 받는 김일성대 교수의 경우에도 월급은 5000원에 불과하다. 둘 다 교수직에 매달리다간 굶어 죽기 십상이란 얘기다. 그나마 김일성대 교수에게는 아파트와 식량(가족 1인당 하루 쌀 600g)이 공급된다. 탈북인사는 “부부 김일성대 교수의 경우 집만 덩그러니 있고 생계는 빠듯한 한국의 ‘하우스 푸어(house poor)’인 셈”이라고 말했다.
암달러로 50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은 그저 ‘상징적 임금’이란 인식이 퍼지며 사회 부작용도 속속 생겨났다. 비공식 수익활동과 뇌물의 성행이다. 기관 소속 차량을 몰래 운행해 돈벌이를 하거나 공장 부품을 하나둘 빼내 조립해 시장에 파는 경우다. 김일성대와 김형직사범대 같은 명문대 교수들은 과외시장에 뛰어든다. 탈북인사는 “3~5명 정도를 가르치는데 시간당 각기 1달러 정도를 받는다”고 전했다. 장마당 허가권과 입시·취업·승진 등 사회 전반에 뒷돈과 뇌물이 성행하는 것도 결국 월급으론 살 수 없는 현실 때문이란 분석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다시는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듬해 3월에는 핵 개발 덕으로 국방비를 민생에 돌릴 수 있게 됐다며 경제·핵 병진노선을 들고나왔다. 하지만 약속은 5년 넘게 지켜지지 않았고, 대북제재를 자초해 주민들의 삶은 점점 고단해졌다.
북한에서는 “노동당보다 장마당”이란 말이 은밀히 입에 오르내린다고 한다. 조선노동당은 민생을 내팽개쳤지만 장마당은 숨통 역할을 해 준다는 의미다. 김정은은 ‘핵 강국’을 외치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성공으로 “미국 본토를 사정권 안에 두게 됐다”고 위협한다. 하지만 달러의 맛에 빠진 주민들은 “미국 할아버지(100달러에 새겨진 벤저민 프랭클린을 지칭)가 최고”라고 여긴다. 중국 할아버지(100위안에 그려진 마오쩌둥)에 이어 ‘수령님’(북한 화폐의 김일성을 지칭)이 제일 마지막이란 비아냥이다. 장마당에 부는 달러화(Dollarization) 바람은 북한 체제를 뒤흔들고 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통일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