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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희생자의 서사’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에선 아파트 단지의 강아지들이 사라진다. ‘살인의 추억’(2003)은 말할 것도 없다. 1980년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연쇄 살인 사건을 토대로 한 이 영화에서 형사들은 범인을 미치도록 잡고 싶지만 끝내 잡지 못한다.
‘괴물’(2006)에선 한강에서 튀어나온 괴물 때문에 어느 가족이 큰 고통을 겪는다. ‘마더’(2009)에선 예상치 못했던 살인이 일어난다. ‘설국열차’(2013)의 열차엔 꼬리칸에서 억압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전진의 대가로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 그리고 ‘옥자’다. 다국적 기업 ‘미란도’에 의해 10년 동안 전세계에서 사육된 수퍼돼지들 중 한 마리인 옥자는 이제 죽음의 시간을 맞이해야 한다.
이 중심에 소녀가 있다. 그들은 직접 희생자가 되거나(‘살인의 추억’‘괴물’‘마더’), 희생자와 교감하는 존재거나(‘플란다스의 개’‘옥자’),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의 불씨가 된다(‘설국열차’). 봉준호 감독의 플롯에서 소녀는 항상 열쇠를 쥐고 있으며, 역할의 비중과 상관 없이 결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세 영화에서 그들은 모두 미지의 존재에 의해 희생 당한다. 그러기에 그 공포는 더욱 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쇄 살인범, 도대체 어디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괴물, ‘동네 바보’ 취급을 당하는 남자. 그들은 모두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이며 시스템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 그들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으며, 그러기에 피할 수 없고, 그래서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감독은 모두 ‘교복 입은 여학생’을 희생자의 자리에 놓는다. 가장 연약한 존재의 이미지를 지닌 그들은, 사회의 안전 체계에 의해 보호 받지 못하고 한강 둔치와 하굣길에서 납치 당하고 살해 당한다.
아정의 친구 미도(이미도)는 얼굴에 큰 흉터를 지녔고, 남학생들에겐 폭력의 대상이다(사진 4). 재수생인 미나(천우희)는 진태(진구)의 성적 대상이다. 이들은 이 시골 마을에서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들인 셈이다.
‘옥자’에서 산골 소녀 미자와 수퍼돼지 옥자는 아예 자매와도 같다. 그들은 산에서 함께 뒹굴고, 서로 목숨을 구해 주며, 심지어 말이 통한다(사진 6). 옥자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고스란히 미자에게 전이된다.
17살인 요나는 아포칼립스 이후에 태어난, 즉 열차 안에서 세상에 나온 첫 세대다. 그 아이는 꼬리칸 사람들의 격렬한 투쟁 과정에서 생존하고, 남궁민수(송강호)가 열차 문을 폭발시키려 할 때 불을 가져다 주는 인물이다. 열차가 멈추자 요나는 어린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태어나 처음으로 땅을 밟는다.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며 요나는 그 첫 걸음을 뗀다(사진 7).
소녀의 관점에서 본다면 ‘옥자’의 미자는 ‘설국열차’의 요나와 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초능력을 지녔고, 강한 의지를 지녔으며, 극한 상황을 극복한다. 그들의 공간은 거대한 자연(방대한 설원과 깊은 산속)이며, 10대인 그들에겐 산 날보다 살 날이 더욱 많다. ‘설국열차’와 ‘옥자’의 두 소녀는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닌 희망과 미래의 존재인 셈이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