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김영희 칼럼] 한·미 정상회담, 준비한 만큼 거둔다

중앙일보

입력 2017.06.30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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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니스트·대기자

백악관에서 일본 총리 아베 신조를 포옹으로 맞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정상회담 직전에 무려 19초의 이례적으로 긴 악수를 했다. 트럼프는 2월 10일의 미·일 정상회담에 딸, 사위, 부통령, 비서실장까지 배석시키는 세심한 배려를 했다. 한반도가 위급한 상황에서 열리는 최초의 한·미 정상회담 참석자들의 면면을 보면 트럼프가 이 회담에 두는 무게의 한 면이 보일 것이다. 내일이면 알 수 있다.
 
워싱턴 일정을 마친 트럼프는 아베와 함께 헬리콥터-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헬리콥터를 번갈아 타고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휴양지의 골프장으로 날아갔다. 둘은 장장 5시간이나 환담하면서 골프를 쳤다. 트럼프가 사용한 드라이버는 아베가 당선자 트럼프에게 선물한 황금색 혼마였다. 일본이 자랑하는 명품이다. 문재인-트럼프의 만남에 마러라고 휴양지는 없다.

사드는 가급적 환경영향평가 빨리
끝내게 “노력하겠다”로 정리하고
북핵은 핵동결로 들어가서
비핵화로 나온다는 입장 고수하며
대북제재 동참하되 조건 갖춰지면
남북대화 재개 필요성 이해시켜야

트럼프는 왜 그렇게 일본 총리를 파격적으로 환대한 것인가. 첫 번째 답은 일본인들 특유의 햇빛 들어갈 틈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한 준비다. 준비를 도운 건 워싱턴 정가의 ‘마당발’ 찰리 블랙이 회장인 로비 회사 프라임폴리시그룹(PPG)이다. 이 그룹의 가장 큰 자산은 지난 대선 때 트럼프의 선거본부장을 지낸 폴 매너포트다. 그들은 도쿄로 가서 자민당 간사장 니카이 도시히로와 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를 만나 3시간 이상 트럼프를 상대하는 비법을 전수했다. 일본이 지불한 자문료는 달랑 5만 달러 정도로 알려졌다. 물론 이 그룹은 앞으로 아베 정부를 위한 대미 로비로 막대한 자문료를 받아낼 것이다. 5만 달러는 마중물이었다.
 
트럼프가 아베를 왜 환대했는가의 두 번째 답은 돈이다. 당선자 시절의 트럼프를 만난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손정의(손 마사요시)는 500억 달러의 미국 투자를 약속했다. 일자리 5만 개를 창출하는 엄청난 투자다. 도요타는 향후 5년간 1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발표했다. 트럼프는 애팔래치아산맥 지역 백인 실업자들의 몰표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 그에게는 일자리 늘리기가 정책의 중심축이다. 아베는 트럼프의 정책 수요를 만족시켰다. 우리 정상회담 동행 경제인단은 5년간 352억 달러의 투자를 약속했다. 일본의 경제 규모가 한국의 세 배임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님을 트럼프는 알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나 준비를 잘하고 갔는가. 미국을 다녀온 문정인 특보와 햇볕정책의 설계·집행자인 임동원 전 국정원장을 만나 의견을 듣고, 전직 주미대사들의 조언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대화는 어디까지나 핵·미사일·사드·자유무역협정(FTA) 같은 큰 이슈들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순간적으로 어디로 튈지, 어떤 말을 내뱉을지 모르는 트럼프의 별난 성격과 스타일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코치할 사람은 없었다.


청와대는 지난 5월 그런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PPG의 찰리 블랙과 폴 매너포트가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함께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블랙과 매너포트는 매케인 상원의원의 원외 아바타 같은 존재들이다. 청와대는 매케인의 문 대통령 면담 일정을 잡지 않고 망설였다. 실망한 매케인 일행은 베트남으로 가버렸다. 매케인은 상원군사위원장이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에 국방장관이나 백악관 안보보좌관 못지않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중차대한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제 발로 찾아오는 그를 만나지 않은 것은 실책이다. 청와대 안보실장이 PPG의 두 쪽짜리 제안서를 받은 것은 출국 직전이다. 그 제안서는 PPG 리더들이 트럼프 대통령과 “아주 가깝다”는 표현을 쓰고 한·미 간 현안에 대한 미국 지도자들의 생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썼다. 미국에서는 정치인과 정부 관료와 로비스트는 한통속이다. 외교관들은 로비스트를 싫어하지만 로비스트 고용이 훨씬 생산적이다.
 
대통령은 정상회담의 목표를 너무 높이 잡을 필요가 없다. 회담은 준비한 만큼 거둔다. 사드는 환경영향평가 기간을 가급적 빨리 끝내도록 “노력하겠다”로 정리하자. 북핵은 핵동결로 들어가서 비핵화로 나온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북한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고강도 압박에 동참은 하지만 조건이 갖추어지는 대로 남북대화를 재개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시켜야 한다. 노무현 정부 출범 때같이 미국은 한국의 진보정권에 생리적(visceral) 불신을 갖는다. 그걸 무마하러 간 문정인 특보는 결과적으로 불신을 키워 놓고 왔다. 문 대통령이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의 한국 방어에 감사를 표하여 트럼프의 신뢰를 얻고 그의 인간적 화학반응(chemistry)을 유발한다면 새 정부 최초의 한·미 정상회담은 성공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희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