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콜 1930~2017
20세기 가장 위대한 유럽의 정치인 중 한 명인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가 16일(현지시간) 타계했다. 87세. 이날 독일 언론은 “콜 전 총리가 루드비히스하펜 인근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그가 평생 몸담은 기독민주당은 “슬픔에 빠졌다”고 짧고 굵게 애도를 표했다.
193㎝ 거구, 좌중 압도하는 힘으로
16년간 재임했던 역대 최장수 총리
통일 뒤 시련있었지만 명예 회복
독일 언론 “위대한 정치인 잃었다”
콜 전 총리는 1930년 라인란트 지방 루드비히스하펜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에서 지낸 유년 시절은 참혹했다. 10대 소년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서 이웃의 시신을 수습했고, 패전 직후엔 배를 곯아가며 두 달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독일의 슈피겔은 이런 경험이 콜 전 총리를 정치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라고 봤다. “콜이 어렸을 때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면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전쟁은 절대로 경험하고 싶지 않다.”
취임 후 그가 맞이한 독일의 80년대는 황금기였다. 패전을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궜고, 국제 무대에서 경제적·정치적 패권을 회복했을 때였다.
안정적인 국내 정치는 콜 전 총리의 시야를 외부로 확장시켰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과는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됐다. 이 시기에 두 사람은 단일 통화시장과 유럽 통합의 토대를 다졌다.
더불어 통일 작업도 시작됐다. 87년엔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과의 역사적 만남이 성사됐다. 본격적인 동·서독 데탕트의 출발이었다. 자신이 속한 기민당이 오랫동안 반대해 온 유화 정책이었지만 콜 전 총리는 속전속결로 통일을 추진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을 만나 동독 주둔군 철수를 요청했다. 소련군 35만 명이 복귀하는 데 드는 비용은 모두 서독 정부가 부담했다.
제국주의 독일의 부활을 두려워한 일부 국가들이 독일 통일에 반대했지만 콜 전 총리는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다. 우리 독일인은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를 사랑하며, 국제사회의 언제나 좋은 이웃이 되겠다”고 거듭 안심시켰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일생일대의 과업을 완성한 뒤 콜 전 총리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통일 비용이 문제였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었지만 그가 약속했던 것들은 이뤄지지 않았다. 직업을 잃고 서독으로 떠밀려 와 빈민으로 전락한 동독인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동독 경제의 파탄은 독일 전체를 흔들었다. “총리가 권력에만 집착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지지율은 급락했고, 98년 16년간 지켜 온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시간이 흘러 스캔들이 잦아들고서야 명예회복이 가능해졌다. 2011년엔 국제관계에 기여한 공으로 ‘헨리 키신저 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엔 그의 공로를 기리는 우표가 발행됐다. 연방정부가 발행한 우표는 ‘통일의 총리, 유럽의 명예시민’이라는 문구로 그를 재평가했다.
슈피겔은 “세상에 완벽한 총리는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독일과 유럽의 통합에 있어서 콜은 위대한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