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 대로변에서 수험서를 판매해온 ‘한국서점’이 10일 사라졌다. 그 곳에 자리를 잡은 지 18년 만이다. 건물주는 “재건축 예정이니 점포를 빼 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장씨 부부는 서점 운영을 포기하고 그곳에서 500m쯤 떨어진 원룸촌에 부동산 중개업소를 차렸다.
고시 서점은 문닫고 독서실은 원룸으로
사법시험 강의하던 학원가는 공시생 유치 노력
"고시촌 흔적 지워지는 것 아쉬워" 기념관 건립 시도도
인근의 부동산 중개업소 직원 A씨는 “술집, 밥집 장사는 덜 되는데 반해 원룸은 계속 수요가 있어 원룸과 오피스텔이 계속 들어선다”고 말했다.
마지막 사법시험 2차 시험을 8일 앞에 둔 13일, 30년 가까이 법조인의 산실이었던 신림동 고시촌 곳곳에선 ‘아듀(Adieu), 고시촌’을 상징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신림동 고시촌은 1975년 서울대가 종로구에서 관악구로 이전하면서 형성됐다. 값싼 술집과 밥집, 고시 학원, 고시 식당, 고시 독서실, 고시 서점 등이 얽혀 특유의 문화를 만들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서울대에 다니는 자취생과 고시 준비생 덕분에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사법시험이 올해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풍경이 크게 바뀌었다. 한때 ‘고시 독서실’의 간판을 달고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있던 독서실은 최근 1년 새 10곳 넘게 원룸 건물로 바뀌었다.
고시촌 한가운데서 10년 동안 독서실을 운영했던 이모(53)씨도 ‘원룸 임대 사업을 하려 한다’는 건물주의 말에 4월 말 영업을 접었다. 이씨는 “지난해 공실률이 50%였다. 사시 폐지뿐 아니라 행정고시 축소 계획도 고시생 감소에 한몫했다. 공시생들은 학원에서, 로스쿨 준비생들은 학교에서 공부하기 때문에 독서실 운영이 어렵다”고 말했다.
신림동 고시촌을 상징하던 명소도 자취를 감추거나 쪼그라들고 있다.
1988년부터 서울대생들의 세미나실 역할을 한 인문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은 지난달 경영난으로 축소 이전했고, 그 자리에는 패스트푸드점이 들어섰다. 이해찬 전 총리와 그의 가족이 1978년부터 35년간 운영하던 ‘광장서점’도 2013년 부도가 난 뒤 ‘북션’으로 간판을 바꿨고, 올해 하반기엔 옆 건물 지하 1층으로 이전한다.
겉모습이 빠르게 변하는 것과 별개로 고시촌 거주 인구는 거의 그대로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대학동 인구는 2012년~2015년까지 2만3000명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부동산정보 제공 사이트 서울부동산정보광장 조사에 따르면 신림동 고시촌 인근 단독ㆍ다가구의 월세 거래 건수도 2015년 936건에서 지난해 3235건으로 증가했다.
고시생들이 비운 자리를 7ㆍ9급 공무원시험이나 경찰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이 대체했고, 주거비가 싸 직장인들이 모여들었다. 소망공인중개사 나봉림 대표는 “서울 여느 곳보다 집값이 싸기 때문에 방세를 아끼려고 이사오는 직장인이 많다. 오래된 거리라 상권이 잘 형성돼있어 신혼부부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옛 풍경을 기억하려는 이들도 있다. 대학동주민자치위원회 김태수 위원장은 “고시촌 풍경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지난해 서울시 ‘고시촌 기념관’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고시원을 개조해 고시촌의 30년 역사를 보여주자는 것이다. 지난 번에는 뜻대로 안 됐지만 올해 다시 시도할 것이다”고 말했다.
윤재영 기자 yun.jaey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