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위축되도 문자로 타인 이해하려는 욕망 여전할 것"

중앙일보

입력 2017.06.12 14:29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지난달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한 나이지리아 출신 영국 소설가 벤 오크리(왼쪽)와 한국 작가 김연수씨. 변방의 작가들의 미국·영국 등세계문학 중심에 진출하는 방법 등에 관한 대담을 나눴다. 김상선 기자

 언어와 문화 장벽은 여전히 한국문학 세계화의 걸림돌이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출신 영국 작가 벤 오크리(58)는 동의하지 않았다. "시장을 바꾸면 된다"는 주장을 폈다. 두 언어, 두 정체성 사이에 가로놓인 삶을 살아온 그는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장편 『굶주린 길』로 1991년 부커상을 받으며 비중 있는 작가로 떠올랐다. 지난달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한 그를 한국 작가 김연수(47)씨가 만나 세계 시장 진출 노하우, 문학의 미래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김연수(이하 김)=당신 소설 『굶주린 길』을 재미있게 읽었다. 서양소설과 많이 달랐다. 사후세계가 나오고, 소설 속 시·공간이 뒤죽박죽이다. 마치 한국 옛날이야기 같았다.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한 김연수씨.

▶벤 오크리(이하 오크리)=흥미로운 얘기다. 나는 새로운 소설 규칙을 마련해 보고 싶었다. 아프리카의 구전 이야기 전통을 살려 다차원적이고, 다양한 목소리가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 서양 소설에서는 눈앞의 벽은 뚫고 나갈 수 없고, 죽음은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이다. 하지만 그런  '리얼리티(실재성)'는 절대적인 게 아니다. 이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나 자신을 철저하게 재교육했다. 소설은 결국 철학이 구체화한 형태다. 시·공간에 대한 철학이 바뀌면 소설도 바뀐다.  
▶김= 한국에도 구전 이야기 전통이 있었다. 20세기 들어 서양 소설기법이 들어와 지금의 한국 현대문학으로 발전했다.  
▶오크리=서양의 소설양식이 당신의 리얼리티를 잘 대변한다고 생각하나.  
▶김=지금까지 소설 쓰면서 큰 불편을 못 느꼈다. 다만 최근에 조선시대가 배경인 소설을 쓰면서 옛날 서적을 참고하는데 과거 우리 선조들이 인식했던 시·공간이 당신 소설과 비슷했다. 꿈과 현실이 마구 뒤섞여 있다. 그 풍성한 이야기를 서양 소설식으로 썼다가는 제대로 못 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작가에게 언어장벽은 해외 진출의 걸림돌이다. 영어 사용자는 유리할 것 같다.  
▶오크리=내가 지금 누리는 것들은 거저 얻은 게 아니다. 싸워서 획득한 거다. 소설에 대한 나 자신의 고정관념을 매일 허물어뜨리며 '마음의 식민지'에서 탈출하고자 한 결과다. 다시 말하지만 서양의 리얼리티는 하나의 구성물일 뿐이다. 예술가라면 당연히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럴 때 싸움은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느냐가 아니다. 자신만의 리얼리티를 찾아야 한다.  
▶김=리얼리티와 다른, 시스템이라는 것도 있다. 글로벌한 차원의 작가 선별 시스템 말이다. 작가의 개별적인 리얼리티가 다양성에 도움이 되는 건 맞다. 하지만 그러러면 먼저 뉴욕·런던의 문학시장에 진출해야 하는데 한국 작가에게는 쉽지 않다.
▶오크리=시스템은 변한다. 그걸 바꾸는 건 작가들 몫이다.  
▶김=어떻게 바꾸나.
▶오크리=작품을 통해, 시장의 한계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시장에서 인정받는 한국 작가가 늘어나면 시장은 결국 변한다. 작가가 시장에 맞춰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건 문화적 자살 행위다. 작가는 정확하게 자기가 하던 일을 하면 된다. 영어 사용 시스템에 들어오려 애쓸 필요 없다. 지금 영국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건 한국처럼 영국 바깥 작가들의 작품이다.  
-화제를 바꾸자. 기술 발달로 문학은 어떻게 바뀔까.  
▶오크리=인터넷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읽을 거리가 쏟아진다. 몇년 전까지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읽으면 종이책으로 볼 때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소설을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읽는다. 스마트폰이 문학의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종이책의 보급은 인간 역사에서 매우 짧다. 인쇄술이 발명됐을 때도 사람들은 문학이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김=요즘 스마트폰의 음성변환 앱은 소설을 읽어준다. 구술 전통과 이어진 당신 소설이 기술발달로 인한 문학의 미래와 겹쳐 흥미롭다.  

서울국제문학포럼 참가한 벤 오크리.

▶오크리=문학이 어디로 갈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소설도 진화해야 한다는 거다. 사람들이 변하니 소설도 변할 것이다.  
-디지털로 소설의 존재 가치에 변화는 없을까.  
▶오크리=소설을 읽는 것은 타인의 삶에 참여하는 행위다. 다른 어떤 예술도 소설만큼 타인의 삶에 깊숙히 끌어들이지는 못한다. 30년 친구 사이라도 못하는 얘기가 있지 않나. 소설은 친구를 50년 사귄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단숨에 알게 한다. 사람을 연결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비행기나 도시보다도 특별하다.  
▶김=소설에서 느끼는 경험의 강도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훨씬 세다고 생각한다. 영상은 시청자를 어느 정도 구경꾼으로 놔두지만 소설은 독자가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끝까지 읽을 수 없어 그럴 거다. 결국 타인을 이해하는 한 방법인데, 그게 막히면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지 않을까. 미디어가 바뀌어도 문자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려는 욕망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