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페미니즘은 없다...'불꽃 속에 태어나서' 리지 보덴

중앙일보

입력 2017.06.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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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평화를 위한 혁명이 일어난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여성의 지위가 낮다면? 페미니즘 영화 계보에 한 획을 그은 ‘불꽃 속에 태어나서’(1983)는 이 질문에서 시작했다. 배경은 가까운 미래의 뉴욕. 사회 개혁은 성공했지만 거리엔 성폭력이 만연하다. 활동 단체 ‘여성의 군대’는 여성 권익을 주장하기 위해 해적 라디오 방송국 두 곳과 손을 잡는다. 제각각 활동을 이어가던 여성들은 ‘여성의 군대’ 리더가 감옥에서 숨지자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34년이 지났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종과 계급을 넘어 여성이 연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회 변화를 위해 폭력을 활용해도 되는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만난 리지 보덴 감독 [사진=김진솔]

 
리지 보덴 감독은 “당시 공산주의, 사회주의 담론을 담은 영화는 많아도 페미니즘 영화는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페미니즘 연구는 백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를 담는 게 관건이었다. 레지비언 술집, YMCA 여성 농구단 등을 직접 찾아갔다. 각기 다른 위치의 여성이, 다르지만 함께 목소리를 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계급이 낮은 여성은 평등한 급여는 둘째 치고 안전하게 살기 바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영화가 지금도 의미 있는 건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아서다. 전 세계에서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은 여전히 많다.”
 

영화 불꽃 속에 태어나서 사진=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불꽃 속에 태어나서’는 사회 운동의 도구로서의 미디어를 조명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정보의 접근성이 매우 높아진 현재, 보덴 감독은 “개인 미디어의 발달은 혁명의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라 진단했다. “하지만 인도 등 여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나라는 이마저도 불가능하다. 또 농촌 지역에선 여전히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한다. 이런 차이를 해소하는 게 중요하다.” 보덴 감독이 가장 힘줘 말하는 건 “여성주의, 가부장제처럼 학문적 용어가 아닌, 실제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여성의 언어’”다.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고통을 공감하며 연대하는 것.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은 꼭 존재해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한 가지 페미니즘은 없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 영화의 전설 '불꽃 속의 태어나서'
30년 전 던진 다양한 여성에 관한 화두
여전히 유효한 건 현실이 바뀌지 않아서

보덴 감독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미국 사회에 아쉬움을 표했다. “미국 사회에는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무지한 남성이 여전히 많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건, 그가 명철해서가 아니라 트럼프와 같은 남성이 많아서 일거다.” 그는 “폭력적 언어로 다른 성별을 비방하는 일은 미국에도 있다”고 말했다. “그 방식이 바람직하진 않다. 하지만 트럼프가 저속한 말을 하면 할수록, 우린 매일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미래에 집중해야 한다. 여러 미디어에서 올바른 생각을 공유하며 자기 삶과 권리에 관해 질문을 던지면 좋겠다. 크고 작은 실천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좋은 본보기를 만들어야 한다.” 명쾌하고 낙관적인 그의 말에 심기일전 해 온 연출자의 면모가 엿보였다. 그는 20여년 간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내 주제는 늘 ‘여성’이었다. 낙태를 주제로 한 영화를 기획했지만 투자 받지 못했다. 수위가 높은 여성 영화를 만드는 건 쉽지 않다. 지금은 스트립 댄서에 관한 영화를 준비한다. 성적 대상으로 여겨 온 이들을 색다른 관점에서 소개할 생각이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