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요즘 중·고등학생들, 집 대신 카페서 과외한다

중앙일보

입력 2017.06.03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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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공족’ 시대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일명 ‘카공족’이라 불리는 학생들이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대입구역 앞 카페에서 스터디 모임과 공부를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지난달 31일 오후 프랜차이즈 카페 ‘탐앤탐스’ 서울대입구점에서는 대화 소리를 듣기 힘들었다. 3층 좌석을 채운 30여 명 대부분이 두꺼운 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고 있었다. 몇몇은 노트북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작은 2~3인용 테이블들 사이에 도서관에서나 볼 법한 정사각형의 긴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테이블에는 노트북이나 휴대전화를 충전할 수 있도록 좌석마다 콘센트도 설치돼 있었다. 이날 서울대 재학생인 한경록(27)씨도 카페 한쪽에서 두꺼운 재정학 교재를 펼친 채 공부를 했다. 한씨는 “학교 중앙도서관은 책 넘기는 소리만 크게 내도 눈치가 보이고 답답한 느낌이 들어 카페를 찾았다”고 말했다.
 
‘공부하러 도서관에 간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 됐다. 전국에 퍼져 있는 9만여 개(지난 4월 소상공인진흥공단 조사 결과) 카페들이 도서관 겸 사무실의 역할을 상당 부분 대체했다. ‘카공(카페에서 공부하는)족’이라는 신조어가 낯설지 않을 정도다.

카공족 갈수록 늘어나
“카페서 공부” 65%, 도서관은 23%
“자유롭게 전화, 간식도 먹어 좋아”

카페 업계 엇갈린 반응
스타벅스 “카공족 위한 시설 확대”
동네 카페 “수익 내기 힘들어 고민”

주인·손님 간 규칙 필요
3시간 지나면 음료 추가 주문 등
진상손님 막기 위한 룰 만들어야

20~30대가 주로 찾는 구인·구직 전문 사이트 ‘알바천국’의 설문조사 결과도 이런 흐름을 여실히 보여준다. 알바천국이 지난달 이용자 765명을 대상으로 ‘공부나 독서, 노트북 작업을 위해 주로 찾는 공간’을 묻자 64.9%가 카페라고 답했다. 도서관을 선택한 응답자(23.4%)의 세 배에 가까운 비율이다.


서울 대치동 한 카페에서 고등학생이 과외수업을 받고 있다.

정보기술(IT) 관련 기업에 다니며 주말마다 시민 기자 사이트에 기사를 기고하는 신모(27)씨의 작업실은 집 앞 작은 카페다. 신씨는 “현대인에게 도서관보다 카페의 접근성이 월등히 좋다”고 말했다. 그는 “도서관은 각 구에 3~5곳 정도 있지만 카페는 반경 100m 안에서도 대여섯 곳씩 눈에 띈다”고 덧붙였다.
 
도서관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카페의 유인 포인트다. 신씨는 “카페는 애초에 정숙을 요구하는 공간이 아니다 보니 필기를 하거나 타이핑을 할 때 눈치가 안 보인다. 또 도서관과 달리 커피나 와인을 즐기면서 책을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설문조사 응답자들도 카페의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를 강점으로 꼽았다. 전체의 82.96%가 ‘커피와 간식을 먹으며 공부하기 편해서’ ‘전화 통화 등 도서관보다 자유롭게 행동하기 쉬워서’ 카페에 간다고 답했다.
 
카공족이 대세인 시대에 카페 업주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들은 적극적으로 카공족들을 잡겠다는 입장이다.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인 ‘스타벅스’ 관계자는 “프랜차이즈 카페들은 대체로 좌석 여유도 있고 테이크아웃 손님도 많기 때문에 카공족들로 인해 영업에 큰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공부도 할 수 있고 작업도 할 수 있는 지역의 사랑방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콘센트를 설치하는 등 카공족들을 위한 시설을 적극 확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탐앤탐스 관계자도 “학원이 많은 강남역과 노량진역·대방역 근처에 있는 매장에는 칸막이 책상도 설치했다. 대학가 인근 매장은 24시간으로 운영하면서 밤늦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프랜차이즈 카페 ‘커피빈’은 원래 매장 내에 공공 와이파이와 콘센트를 설치하지 않았다. ‘카페는 대화를 위한 공간’이라는 생각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새로 문을 여는 매장들에는 와이파이를 설치하고 있다. 커피빈 관계자는 “와이파이나 콘센트에 대한 요구가 많아 학생이나 회사원 손님이 많은 기존 매장과 신규 매장에는 와이파이를 설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동네의 작은 카페들은 카공족이 반갑지만은 않다. 서울 서교동에서 테이블 10개 남짓한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45)씨는 “좌석이 적고 테이크아웃 수요가 많지 않은 동네 카페에서는 음료 한 잔을 5000원이라고 할 때 한 사람이 2시간마다 한 잔씩은 주문해줘야 수익이 남는다. 한 번은 오후 2시쯤 회의를 하러 들른 사람들이 점심, 저녁을 교대로 먹고 오면서 오후 8시까지 있었다. 음료 강제 주문 규정을 만들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말했다. 알바천국의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1.31%가 “한번 카페에 가면 3~4시간 정도는 머무른다”고 답했다. 서울 상수동에서 입소문이 난 북카페 ‘이리카페’를 운영하는 김상우 사장도 “단골들이 와서 책 읽고 작업하는 공간을 유지하는 기쁨이 있지만 사실 수익을 많이 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카공족 전성 시대에 맞춰 카페 주인과 손님들 간에 룰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냈다. 권영준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는 “누구나 공부하기 좋은 카페를 찾는 시대이기 때문에 아주 바쁜 시간대가 아닌 이상 오래 앉아 있기 좋은 카페로 입소문이 나는 것은 동네 카페에도 이득이다. 다만 ‘진상 손님’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 3시간이 지나면 음료 한 잔을 추가 주문하는 등의 룰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카페가 도서관이자 작업실 역할을 대신하는 현상은 더욱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한 멍석을 깔아주면 부담을 느껴서 더 집중하기 힘들어한다. 도서관에 각 잡고 앉아 있기보단 버스에서 잠깐 보는 영어 단어가 더 머리에 들어오듯이 뭘 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이 덜한 카페가 점점 더 도서관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중·고딩’도 카공족 합류
 

서울 대치동의 한 카페에서 중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 [윤재영 기자]

카공족은 성인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달 30일 서울 대치동의 ‘투썸플레이스’ 매장에는 10~15분마다 중·고등학생 손님들이 들어섰다. 혼자 들어와서 과일 스무디 메뉴를 시킨 이가빈(16)양은 테이블에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가빈양은 “학원 가기 전에 숙제를 하려고 들어왔다. 집중이 잘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1㎞ 정도 떨어진 한 카페에서는 중학교 1학년인 강모(13)군이 영어 교과서를 읽고 있었다. 공부한 지 3시간 정도 됐다는 강군은 “일주일에 서너 번은 카페에 온다. 도서관은 오히려 만화책 같은 유혹 거리가 있다. 이 카페가 조용하고 커피 값도 3500원으로 싸서 선택했다”고 말했다. 강군은 “부모님도 도서관 가는 것보다 카페 가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날 오후 7시쯤 입시학원이 밀집한 지하철 3호선 대치역 근처 카페 ‘이디야’에는 전체 테이블의 80%가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생들의 개인과외 장소도 집에서 카페로 옮겨졌다. 강군이 공부하던 카페 한쪽 구석에서는 재수생 오승준(19)씨가 양지원(18)양에게 국어와 화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오씨는 카페를 선택한 이유로 “집에서 하면 학부모를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카페에서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르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원양도 “자유롭고 통제적이지 않은 분위기가 좋다”고 말했다.
 
[S BOX] 자연의 소리 백색소음, 적막감 달래줘 집중력 높여
 
카공족에 대한 이야기에는 ‘백색소음’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알바천국의 설문조사에서 카공족 528명 중 116명은 “약간의 백색소음이 있는 게 집중이 더 잘 된다”고 했다.
 
백색소음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자연의 소리를 말한다. 배명진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장은 백색소음이라는 단어가 태양광을 뜻하는 백색광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배 소장은 “태양광은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빛깔이 섞인 색이다. 백색소음도 도·레·미·파·솔·라·시 일곱 가지 음계가 섞인 소리라고 해서 ‘백색’이란 단어가 붙었다”고 말했다. 배 소장에 따르면 폭포나 비바람 같은 자연의 소리는 모두 백색소음이다. 그는 “백색소음은 특별한 내용을 담지 않아 방해는 안 되면서 적막감과 외로움은 달래주기 때문에 더 오래 집중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집중이 잘 되는 소리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녹음된 백색소음을 틀어놓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 종류의 백색소음을 담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도 출시됐다. 이런 앱들에 담긴 소음에는 ‘홍익대 근처 A 카페의 소리’처럼 특정 카페 내의 잡담 소리도 들어 있다. 배 소장은 “비행 시간이 긴 국제선 비행기에서도 백색소음을 틀어놓는 경우가 있다. 여러 기내의 소음이 승객들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김나한 기자
 
김나한·윤재영 기자 kim.nah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