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더빈 발언을 “그냥 미국 시민 질문”으로 느꼈다는 청와대

중앙일보

입력 2017.06.02 17:04

수정 2017.06.0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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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청와대에서 딕 더빈 미국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를 만났다. [중앙포토]

 
 
지난 1일 오후 청와대 기자실(춘추관)이 어수선해졌다. 전날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딕 더빈 미국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가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를 원치 않으면 9억2300만 달러(약 1조300억원)의 관련 예산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고 문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당시 청와대 브리핑에선 그런 내용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화들짝 놀란 출입기자들이 청와대 관계자에게 몰려갔다.
 
▶기자=“더빈 총무가 그렇게 말한 게 사실이냐”
▶청와대 관계자=“비슷한 취지의 발언이 있었다. ‘미국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미국은 한국에 사드 배치를 위해 9억2300만 달러를 지불할 예정인데 한국 내에서 사드 배치가 큰 논란이 되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고 했다”
▶기자=“민감한 발언인데 어제(5월 31일)는 왜 공개를 안 했나”
▶관계자=“(더빈 총무 발언이) 그렇게 중요한가…아, 그냥 미국 시민으로서 국익 차원에서 평범한 질문을 하는구나, 그렇게 받아들였다”
 
청와대는 지난달 31일 브리핑에서 더빈 총무가 “한국 도착 즉시 사드 뉴스를 많이 들었다”며 문 대통령에게 사드 관련 질문을 시작했다고만 알렸다. 청와대가 나중에 공개한 ‘미국 납세자’나 ‘큰 논란이 되는 것에 놀랐다’는 등의 문구는 빠졌다. 청와대는 “사드 예산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는 말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렇다쳐도 핵심적 내용들이 브리핑에서 생략됐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 내 사드 논란을 지켜보는 미국 의회의 불편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표현들 말이다.
 
‘부실 브리핑’에 대한 해명도 이해하기 어렵다. 청와대 관계자는 “더빈 총무의 질문은 미국 정치인으로서 (사드와 관련한) 상황 인식을 잘 갖고 있지 않았다”거나 “미국 시민으로서 국익 차원에서 평범한 질문을 하는 걸로 받아들였다”며 애써 발언의 의미를 낮췄다.


하지만 진짜로 더빈 총무가 ‘그냥 미국 시민 수준으로 평범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임기 초반 시간에 쫓기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뭐하러 만났을까. 브리핑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4선 의원이자 미 의회 세출위원회 국방소위 소속인 더빈 총무의 위상을 감안하면 궁색한 설명이다. 
 
전직 고위외교관은 “더빈 총무는 민주당이지만 미 국방 예산의 3분의1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라며 “더빈 총무의 생각이 그 정도라면 나머지 3분의 2를 좌지우지하는 공화당 원내총무의 생각은 더욱 심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빈 총무 발언의 파문이 커진 건 애시당초 지난달 30일 청와대가 사드 발사대 4기에 대한 국방부의 ‘보고 누락’이 “매우 충격적”이라고 말한 문 대통령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면서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의 발언이 “전적으로 국내적 조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드 자체가 한반도 주변 강국이 관계된 국제적 이슈인데 대통령의 관련 발언이 국내적 이슈에만 머물긴 어려운 법이다.
 
더군다나 상당수 언론이 크게 다룬 더빈 총무의 발언을 고의적이든 아니든 청와대가 애초 브리핑에서 빼먹은 게 국민을 향한 또다른 ‘보고 누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정치부 허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