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교만은 겸손보다는 덜 위험하며, 죄를 만들 수 있는 소지가 없기 때문에,
소탈은 쓸데없는 예의나 격식이 없어서 좋은 것이다.”
-1974년에 쓴 글 ‘새벽의 세계’ 중에서
경기도 양주서 탄생 100주년 기념전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하는 거장
돈·명예 내려놓은 ‘심플’한 삶
개막식 참석한 97세 부인
“장 선생 덕에 호강” 환한 미소
그 중 ‘자화상’(1951)은 한국전쟁 시기에 그린 대표작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지독히 혼란스런 나날을 보내던 그는 충남 연기군의 고향집을 찾고서야 비로소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자화상’도 그렇게 나왔다. 멋들어진 연미복 차림에 콧수염까지 근사한 남자가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황금빛 들판의 외길에 서있는 모습이다.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생전에 이 그림에 대해 그가 남긴 말이다.
또 다른 대표작 ‘가족도’(1972)도 있다. 그림에 몰두하느라 가족과 떨어져 지내기 일쑤였고, 가족의 생계마저 뒷전이었지만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애정은 숱한 작품에 거듭 드러나곤 했다.
1917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전국단위 학생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을 거듭 수상, 일찌감치 재능을 드러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의 길을 결심, 일본 유학을 다녀와 해방을 맞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직,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직을 거쳤다. 그가 생업을 그만두고 그림에 몰두하는 사이 아내 이순경 여사는 서울에서 서점 ‘동양서림’을 운영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한편 매주 덕소의 화실을 찾아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지난 26일 열린 기념전 개막식에서는 올해로 97세를 맞는 이순경 여사에게 참석자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그는 “장선생 덕에 제가 호강을 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원로조각가이자 서울대 시절 사제관계로 처음 만난 최종태 선생은 “장욱진은 일본을 통해 20세기 서양미술을 접했으면서도 일본풍도, 서양풍도 아닌 ‘천진한 형태’로 우리 민족의 얼을 담아낸 20세기 미술사의 보기 드문 사례”라고 거장을 기렸다.
장욱진은 그림에 더해 후세에 귀중한 자취를 곳곳에 남겼다.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로 ‘장욱진 가옥’도 그렇다. 낡은 한옥을 손봐 화실로 삼았던 그는 그 옆에 자신의 그림에 곧잘 그렸던 대로 뾰족지붕의 소박한 양옥을 직접 지었다. 이곳에서는 탄생 100주년 기념 드로잉 전이 열리고 있다. 유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다 최근 발견, 처음 공개하는 작품들이다.
1976년 처음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장욱진의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는 20여편의 글을 추가한 증보판(열화당)이 새로 나와 그의 예술과 인생을 이해하는 또다른 단초를 제공한다. “나는 남의 눈치를 보면서 내 뜻과 같지 않게 사는 것은 질색이다. 나를 잃어버리고 남을 살아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점잖다는 것을 싫어한다. 겸손이란 것도 싫다. 그러는 뒤에는 무언가 감추어진 계산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솔직한 오만함이 훨씬 좋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편협하다거나 심하면 미친 사람으로 돌리기도 한다.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면 어떠랴, 그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편하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