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569쪽, 2만5000원
불평등의 역사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길다. 하지만 ‘사회과학의 여왕’(폴 사뮤엘슨)이라는 경제학의 주류학자들이 이 문제를 정색 하고 다룬 건 의외로 근래의 일이다. ‘보이지 않는 손’(아담 스미스)의 신성함을 증명하기 위해 수식으로 무장한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불평등은 큰 관심 밖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20여년 간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 현상은 지금보다 훨씬 덜했다.
노벨경제학상 교수의 날선 칼럼집
미국 ‘1달러 1표’ 금권선거로 전락
상위 1% 기득권세력 이익 사유화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 빛 바래
불평등이 평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학계 분위기 속에서 이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해 경제학 논의의 중심 테이블에 올려 놓은 이가 바로 조지프 스티글리츠(74) 콜럼비아대학 교수다. 2001년 ‘정보의 비대칭성’ 연구로 노벨경제학상까지 받은 학계 권위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는 상아탑에 머물지 않고 언론기고 등을 통해 쉬운 말로 대중과 소통한 경제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거대한 불평등』은 2000년대 이후 10여년 간 뉴욕타임스·프로젝트 신디케이트·배니티 페어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한 칼럼의 모음집이다.
미국은 교육 등 기회의 불평등이 심해져 ‘아메리칸 드림’을 더 이상 꿈꾸기 힘든 나라가 되었다고 저자는 개탄한다. 상위 1% 기득권 세력이 이익을 사유화하면서 손실은 사회화하는, 그리고 완전경쟁은 교과서에나 있을 뿐 기업들이 독과점 이익을 챙기는 ‘짝퉁 자본주의’로 됐다고 평가한다. 월가나 다국적기업, 자산가들의 정치자금에 포획된 정치인들로 인해 미국 선거는 ‘1인 1표’가 아닌 ‘1달러 1표’의 금권선거로 전락했다고 본다. 스티글리츠가 ‘세계화(Globalization)’를 비판해 온 것도 다국적기업의 무분별한 확장이 각국에 불평등을 전파한다는 우려 때문이다.
“밀물이 들어오면 배가 다 뜬다”는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이 즐겨 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식 정책 사고는 기업활동의 낙수(落水) 효과가 줄어든 오늘날 통용되기 힘들다고 저자는 본다. 오히려 가계회생을 통해 소비를 진작하는 소득증대의 분수(噴水)효과를 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미국의 수백만 깡통주택 피해자 대신에 몇몇 대형은행 살리기에 몰두했던 오바마의 대응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1%를 위한, 1%에 의한, 1%의 정부’는 이쯤 되면 먼 미국 땅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은 책 추천사에서 한국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소수집단이 온갖 제도를 자기 이익에 맞게 왜곡한다.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역동성, 합리적 분배 기능은 마비되고 지대(地代) 추구자들은 부를 쌓는 사이에 땀 흘리는 이들의 절망과 빈곤은 심해지고 있다.’
[S BOX] 영국 7만명 아이들 70년간 탐구 결론은 빈부격차 심화
‘라이프 프로젝트’는 영국의 7만여 명 아이들을 70년 간 추적한 지상 최대 규모의 인간 탐구다.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신상 변화와 건강·학업성적·직업·소득 등 생애 전반의 개인정보를 관찰·기록하고 유형화했다. 결론은 인생 초기의 몇 년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부모의 빈부 격차의 영향이 압도적이었다. 부유층 자녀는 저소득층보다 정신·육체적으로 건강한 경우가 많았고, 좋은 학업성적과 직업을 얻을 확률이 높았다.
대를 거듭할수록 소득·교육 등 다방면의 불평등이 심화됐다. 엄혹한 운명 결정론에 대한 위안도 들어 있다. 가난해도 화목한 가정, 열성적인 부모와 스승,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의 강한 의지로 계층 핸디캡을 극복한 성공사례도 많았다.
홍승일 논설위원 hong.seung-i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