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강원도 홍천 작업실에서 만난 김시영(59) 작가가 거무스름한 도자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김 작가는 “고려 흑자를 계승하는 도예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고려는 청자, 조선은 백자 아니던가. 고려 흑자는 생경했다. 이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조선시대에 워낙 흰색을 귀하게 여겼던 탓에 자취를 감췄지만 고려 때만 해도 많이들 썼다”고 했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는 왜 명맥도 이어지지 않은 고려 흑자에 매달린 걸까.
문체부·관광공사 문화여행 상품 추진
독학으로 흑자 재현한 김시영 작가
작품 200여 점 모아 전시실 꾸며
“유약 철분 7%, 가마온도 1300도”
작품 해설 듣고 다도 체험도 가능
일본이나 중국에는 전통 흑자 기술이 전수되고 있는 반면 당시 국내에는 스승으로 삼을 만한 도공이 없었다. 독학 끝에 흑자를 빚는 데 성공했고, 지금까지 국내에선 유일무이한 흑자 도공으로 활동해 왔다. 김 작가 작품은 흑자를 청자나 백자보다 더 고급으로 치는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 일본미술구락부가 낸 ‘미술가명감’ 2011년판은 그가 만든 작은 찻잔 하나를 무려 100만 엔(약 1000만원)으로 감정했다. 현재 그가 빚는 달항아리 연작은 점당 3000만원을 호가한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이자 일본 최고의 도자 명가인 심수관 가문의 14대 심수관은 “김시영의 흑자에서 한국 도자의 미래를 봤다”고까지 평했다.
약속된 만남이더라도 온 가족이 사는 살림집에 불쑥 찾아가는 게 멋쩍었는데 김 작가와 아내, 그리고 자인(30)·경인(26) 두 딸의 환대에 긴장이 누그러졌다.
김 작가는 먼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갤러리로 안내했다. 작가의 작품 200여 점을 모아둔 곳으로 국내 최대의 흑자 전시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저마다 모양도 무늬도 다른 흑자가 고고한 먹빛을 뿜었다. 김 작가는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옆에 서서 “청자에 바르는 유약은 철분 비중이 3% 미만이지만 흑자 유약은 7% 이상이어야 한다”거나 “흑자를 굽는 가마 온도는 1300도까지 올라간다”는 등 흑자와 관련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냈다.
갤러리에서 빠져나와 작업동으로 향하니 김 작가의 두 딸이 다완(茶碗·차를 마실 때 쓰는 잔) 체험 자리를 마련해 놨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물레질을 하고, 아버지와 함께 도자기에 쓸 약토를 구하러 산천을 헤집고 다녔다는 두 딸은 모두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현재는 김 작가의 든든한 후계자다.
큰딸 자인씨가 녹차 잎을 곱게 갈아 만든 말차를 흑자 잔에 소담히 담아 건넸다. 불투명한 연둣빛 말차엔 흑자의 무늬가 비쳐 다기를 감상하기 좋다. 굳이 일본에서 더 대중적인 말차를 내는 까닭이다.
차를 마시며 경인씨가 설명을 이어갔다. “가마 온도를 조절하면 자기에 갖가지 무늬가 새겨집니다. 이 과정을 ‘화염을 칠한다’고 표현하죠.”
작가가 기꺼이 문을 열어준 작업실에서의 하루는 충만했다. 고요한 시골 정취를 즐기고, 마당 곳곳에 전시된 흑자의 오묘한 빛깔이나 생김새를 관찰했다. 사람이 테마가 되는 여행이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행 방식이 될 만한 가능성을 봤다. 여행 상품은 아직 출시 전이지만 김시영 작가의 작업실엔 지금도 찾아가 여러 체험을 할 수 있다. 단 지금은 10인 이상 단체 예약만 받는다. 작가가 직접 작품 해설을 하고 다도 체험도 한다. 방문일은 작가와 미리 협의해야 한다. 1인 10만원. 강원도 홍천군 서면 길곡길 29. 033-434-2544.
홍천 글·사진=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