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강원도 홍천 작업실에서 만난 김시영(59) 작가가 거무스름한 도자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김 작가는 "고려흑자를 계승하는 도예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고려는 청자, 조선은 백자 아니던가. 고려흑자는 생경했다. 이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조선시대에 워낙 흰색을 귀하게 여겼던 탓에 자취를 감췄지만 고려 때만 해도 많이들 썼다”고 했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는 왜 명맥도 이어지지 않은 고려 흑자에 매달린 걸까.
“대학 때인 1979년 산악부 활동으로 태백산맥을 종주하다가 검정색 자기 파편을 발견했어요. 분명 옛 도자기인데 새카만 색이었죠. 이건 뭐지 싶으면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거예요. ”
대를 이어 도공의 삶을 사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김 작가는 이 작은 흑자 파편만 아니었다면 도예가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연대세 금속공학과 77학번으로 학부 졸업 후 전공을 살려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까만 도자기’에 뺏긴 마음을 누를 길이 없어 89년 직장을 박차고 나왔다. 곧장 경기도 가평에 가마터 ‘가평요’를 차렸다.
김 작가는 먼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갤러리로 안내했다. 작가의 작품 200여 점을 모아둔 곳으로 국내 최대의 흑자 전시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저마다 모양도 무늬도 다른 흑자가 고고한 먹빛을 뿜었다. 김 작가는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옆에 서서 "청자에 바르는 유약은 철분 비중이 3% 미만이지만 흑자 유약은 7% 이상이어야 한다"거나 "흑자를 굽는 가마 온도는 1300도까지 올라간다"는 등 흑자와 관련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냈다.
갤러리에서 빠져나와 작업동으로 향하니 김 작가의 두 딸이 다완(茶碗·차를 마실 때 쓰는 잔) 체험 자리를 마련해놨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물레질을 하고, 아버지와 함께 도자기에 쓸 약토를 구하러 산천을 헤집고 다녔다는 두 딸은 모두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현재는 김 작가의 든든한 후계자다.
차를 마시며 경인씨가 설명을 이어갔다. “가마 온도를 조절하면 자기에 갖가지 무늬가 새겨집니다. 이 과정을 ‘화염을 칠한다’고 표현하죠.”
작가가 기꺼이 문을 열어준 작업실에서의 하루는 충만했다. 고요한 시골 정취를 즐기고, 마당 곳곳에 전시된 흑자의 오묘한 빛깔이나 생김새를 관찰했다. 사람이 테마가 되는 여행이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행방식이 될 만한 가능성을 봤다. 여행 상품은 아직 출시 전이지만 김시영 작가의 작업실엔 지금도 찾아가서 여러 체험을 할 수 있다. 단 지금은 10인 이상 단체 예약만 받는다. 작가가 직접 작품 해설을 하고 다도 체험도 한다. 방문일은 작가와 미리 협의해야 한다. 1인 10만원. 강원 홍천군 서면 길곡길 29. 033-434-2544.
홍천 글·사진=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