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들 패션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보통 배우의 드라마·영화 속 의상이나 공항 패션인데 최근 하나가 더 추가됐다. 뜨는 아이돌의 의상이다. 공연이나 뮤직비디오를 위해 복잡하고 번쩍이는 장식을 붙인 급조한 옷이나 유니폼처럼 맞춰 입는 건 옛말이다. 아예 국내외 디자이너 컬렉션을 그대로 입거나 아주 살짝만 변형시켜 입기에, 어쩔 땐 인기 브랜드의 살아있는 룩북(Look Book)을 보는 것 같다. 한층 더 가까워진 아이돌과 패션의 관계를 살펴봤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디자이너 컬렉션 입고 무대 서는 아이돌
지난 1월 13일 골든디스크 시상식. YG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걸그룹 블랙핑크가 입은 의상이 한동안 화제가 됐다. 각 멤버가 입은 옷 하나하나가 럭셔리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제니는 생로랑 검정 미니 드레스, 리사는 마크 제이콥스의 핑크 블라우스에 샤넬 브로치와 팔찌를 짝지었다. 사실 이날만이 아니다. 블랙핑크는 데뷔 이후 종종 구찌 재킷이나 알렉산더 매퀸 블라우스, 엘리사브 드레스 등을 입고 무대에 올라 이미 '명품 아이돌'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아이돌이 국내외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 의상을 섭렵하는 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YG의 빅뱅은 2012년부터 지금까지 생로랑 컬렉션을 그대로 옮긴 듯한 무대의상을 종종 선보였다. 2015년 멜론뮤직어워드에서는 매장에 나오지도 않은 생로랑의 2016 서프사운드 컬렉션을 착용해 눈길을 끌었고, 2016년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도 역시 그해 봄여름 컬렉션을 빼 입으며 '생로랑의 아이돌'임을 자랑했다.
방탄소년단 역시 매번 의상이 화제가 되는 아이돌 중 하나다. 2016년 10월 정규 2집을 발표하는 간담회 자리에서 7명 모두가 돌체앤가바나·발렌티노·알렉산더매퀸·버버리프로섬·발망·생로랑 브랜드 옷을 입고 나와 잡지 화보 촬영현장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스타일링으로 힘을 주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가령 미니 드레스에 코르셋처럼 꽉 조이는 두꺼운 벨트를 하거나 망사 스타킹을 신는 식의 간단한 액세서리만으로도 이미지를 변신시킨다. '무엇을 입느냐보다 어떻게 입느냐가 문제'라는 요즘 트렌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중의 관심도 이를 좇아간다. 팬들 사이에서 공항 패션이나 드라마 PPL(간접 광고)처럼 아이돌이 입은 브랜드나 디자이너 이름이 회자된다.
판매가격 공개는 물론이고 의상 표절 논란이라는 부작용도 따른다. 2014년 연말 가요대축제에서 소녀시대가 입은 흰 블라우스와 빨간 쇼트팬츠가 돌체앤가바나의 런웨이 의상(2015 봄여름 컬렉션)을 무단으로 차용했다는 주장이, 2016년에는 빅스가 발렌티노의 자수 박힌 남자 재킷을 표절해 입었다는 시비가 있었다. 해외 컬렉션이 실시간으로 국내에 중계될 정도로 정보가 빨리 공유되는 탓에 '패션 검증'이 전보다 한층 더 까다로워진 셈이다.
무대용 급조 의상은 옛말
무대에서도 국내외 디자이너 컬렉션 입어
컨셉트에 맞춰 새롭게 스타일링
디자이너는 해외 홍보 도움받기도
신곡 컨셉트 맞춰 디자이너와 협업
디자이너와의 협업도 또 하나의 대안이 된다. 무대의상 제작 업체나 스타일리스트가 갖기 힘든 '디자인 능력'을 디자이너에게 빌려 보다 새로운 무대 의상을 보여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특히 가요대상이나 컴백무대·콘서트·뮤직비디오 등 주요 행사에는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2010년 이후의 이주영(제국의아이들)·송혜명(박진영)·홍혜진(소녀시대·씨엔블루) 등 중견 디자이너들이 아이돌과 협업한 첫 주자들이라면, 2~3년 전부터 신진 디자이너들이 아이돌 의상 제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지연(자렛) 디자이너는 슈퍼주니어의 7집 의상(2014)을, 윤춘호(YCH) 디자이너는 태티서(2015 크리스마스 앨범 '디어 산타' 뮤직비디오와 컴백 무대)와 샤이니(2015년 도쿄돔 콘서트) 의상을 제작했다. 유럽에서 활동하다 2016년 한국에 온 김민주(minjukim) 디자이너는 레드벨벳의 옷(2016년 '7월7일' '러시안 룰렛' '루키' 등)은 물론 굿즈 디자인까지 맡았다.
아이돌과 디자이너의 만남은 작업 전부터 브랜드 색깔과 아이돌 그룹의 성격이 어느 정도 맞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다. 김민주 디자이너는 "신곡이 완성되기 전 멜로디만 듣고도 열흘 안에 옷을 완성해야 하는 작업이어서 협업 시작부터 양측의 컨셉트가 일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래에 맞춰 새 디자인이 나오는 게 정석이지만 가끔은 디자이너의 기존 컬렉션 의상이 무대 의상으로 업그레이드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윤춘호 디자이너가 2015년 봄·여름 컬렉션에 내놓은 빨간 우체통 프린트는 태티서와 샤이니 의상에 그대로 이어졌고, 김민주 디자이너가 2015 가을겨울 컬렉션에 내놓은 긴 소매의 프린트 드레스는 레드벨벳의 무대에서 미니스커트·브라톱·베스트 등으로 변형되어 등장했다.
트렌드 세터 이미지 만들기
아이돌이 국내외 디자이너 옷을 입는 이유는 뭘까. SM엔터테인먼트 크리에이티브 본부 측은 "그 자체로 완성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꼽는다. 작업 일정이 빠듯한 경우 이미 만들어져 있는 의상들 중 컨셉트와 부합하는 선에서 고르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SM측은 또 "신선하고 재미있는 스타일을 선보이는 디자이너들이 늘어나면서 이들 옷을 대중에게 선보일 기회를 일부러 마련하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근본적으로 아이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소녀시대·세븐틴 등 아이돌 그룹 다수를 맡아온 서수경 스타일리스트는 "아이돌이 잘 훈련된 노래와 춤으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엔터테이너의 역할을 넘어 이제는 패션 아이콘이나 아티스트로 활약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1세대 H.O.T나 젝스키스가 무대를 장악하는 '환상과 동경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잘 입고 잘 노는 애들'로 팬들의 로망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다. 빅뱅과 2NE1의 등장을 계기로 이제 막 클럽에서 나온 듯한 트렌드 세터라는 이미지 형성이 중요해졌고, 그런 이유로 유행을 이끄는 디자이너 컬렉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아메리칸 빈티지 스타일을, 카니예 웨스트가 세련된 힙합룩을 선보이면서 패션 아이콘이 된 해외 사례를 생각하면 국내 가요계에서도 자연스러운 추세라 할 만하다.
어찌됐건 아이돌이 패션에 힘을 주는 건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더이상 섹시 컨셉트의 춤과 노래, 한 치의 오차 없는 칼군무만으로는 차별화를 할 수 없다. 대형 기획사일수록, 대표급 아이돌일수록 패션에 '장기적 투자'를 하는 이유다. 아이돌 의상을 위한 전문 인력이 투입되는 것도 일반적이다. 전담 스타일리스트 외에 기획사 소속의 비주얼 디렉터가 별도로 관리하기도 한다. 방탄소년단이 소속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김성현 비주얼 디렉터는 "뮤직비디오, 앨범 재킷 사진, 음반 디자인과 의상·헤어·메이크업이 모두 하나의 컨셉트로 연결될 수 있도록 콘트롤하는 역할"이라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