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중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가 10년 업어 키운 슈퍼 돼지 옥자(목소리 이정은)를 바라보는 마음이 이렇게 애틋했을까. 5월 19일 ‘옥자’의 제70회 칸영화제 공식 상영과 기자간담회에 이어 20일 한국 취재진을 따로 만난 자리에서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조금만 툭 건드려주시면 하고 싶은 말이 폭포처럼 나올 것 같다. 한국인들끼리 진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다.” 봉준호 감독의 말이다.
19일 공식 기자간담회와 20일 한국 기자간담회에서 오간 이야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해 싣는다. 올해 칸영화제에 초청된 어떤 상영작보다 두툼한 20쪽짜리 홍보자료, 봉준호 감독이 이틀 만에 50곳 넘게 만난 외신 인터뷰에서도 못 다 한, ‘옥자’에 관한 “진한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 19일 ‘옥자’가 최초 공개된 프레스 스크리닝에서 상영 사고가 있었다.
“영화제에서는 늘 자주 있는 일이다. 오히려 기뻤다. 오프닝신에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담았는데, (영화 상영이 처음부터 재개되면서) 기자들이 이를 두 번 볼 수 있었다.”
- 올해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개막 첫날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는 (넷플릭스) 영화는 황금종려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 어떻게 넷플릭스에 제작비 5000만 달러(약 560억 원)를 전액 투자받게 된 건가.
- 넷플릭스의 간섭이 전혀 없었나.
- 옥자 캐릭터는 어떻게 구상했나.
- 옥자를 구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에 맞서는 미자의 액션 장면들은 슈퍼 히어로로 보일 만큼 강인하게 묘사된다.
“어릴 적 ‘미래소년 코난’(1978, 일본 NHK)란 만화가 있었는데 주인공 코난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장면이 많다. 코난의 여자아이 버전을 만들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미자는 산에서 자란 아이잖나. 옥자가 동물인데 사람 같은 면이 있다면 미자에겐 산짐승 같은 면이 있다. 위기 상황에서 짐승처럼 돌진할 수 있는. 미국 거대 기업이고 누구건 간에 이 아이를 막을 수 없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안서현 양이 얼굴에서 뿜어내는 에너지, 눈빛 자체에도 그런 느낌이 있다.”
- 신예 안서현을 캐스팅한 이유는.
“‘몬스터’(2014, 황인호 감독)란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친구다. 담대하고 침착하다. 미자다운 면이 있달까. 미자 캐릭터가 뭐랄지, 디즈니 공주의 모습은 아니잖나. 약간 투박하면서, 풀숲에 잠들어있다가 쓱 일어나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소녀로 어울렸다. 처음 ‘옥자’를 하러 왔을 때부터 작품 해석을 잘 해왔다. 딱히 내가 덧붙이거나 할 게 없었다.”
- 제이크 질렌할, 틸다 스윈튼은 제작 초반부터 합류했다고. 다소 만화처럼 과장된 이들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 갑자기 나타나 미자를 돕는 동물해방전선(ALF‧Animal Liberation Front)은 실존하는 단체라고.
“이 영화의 중심에는 옥자라는 생명체가 있잖나. 이 독특한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세 그룹이 거대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서로 돕거나 맞선다. 미자한테 옥자는 동생이자 딸내미, 가족 같은 존재다. 그리고 옥자를 제품으로 보는 미란도 그룹이 있다. 케이(폴 다노)와 제이(스티븐 연)이 있는 ALF에게 옥자는 자신들의 이상이자 이데올로기다. ALF는 1960년대 영국에서 만들어진 점조직이다. 미국 워싱턴에서 그들을 직접 만났다. 영화에서 그렸듯이 그들도 결함이 있고 완벽하진 않지만, 인간과 동물의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그들의 고민에는 동의하기 때문에 영화에 등장시켰다.”
- 여정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르는 도축장 장면은 충격적이다. 무엇보다 옥자에 대한 성적 학대는 여느 극영화에서 본 적이 없는 장면이다. 왜 이런 충격이 필요했나.
“촬영 전 최두호 프로듀서와 미국 콜로라도의 거대한 축산공장에 갔는데 정말 압도적이었다. 잠실 운동장보다 더 큰 사이즈의 공장에서 하루에 수 천, 수 만 마리가 죽어 나간다. 보통 공장은 조립을 하는데, 이 공장은 이미 완성된 생명체를 하나하나 분해한다.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며 한 달 정도 고기를 못 먹었다. 특히 짝짓기는 동물 관련 다큐멘터리들이 많이 다뤄왔지만, 극영화에선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동물도 취향이 있고 늘 하고 싶은 건 아닌데,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에 의해서 억지로 교배를 한다.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가. 동물도 우리와 함께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피로와 고통이 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
- 이 영화의 궁극적인 주제라면.
“육식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동물도 동물을 먹잖나. 단지, 동물들이 대량 생산 시스템의 제품으로 포섭돼 버린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가 문제다. 1㎡가 안 되는 우리에서 고통스럽게 자란 돼지들이 거대한 공장형 도살장에서 금속 기계로 분해된다. 동물들이 풀밭에서 자연스럽게 자랐고 먹을 만큼 도축했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 엔딩에서 미자의 선택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미자가 도살장을 걸어 나오면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하는 어떤 행동이다.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함으로써 이 아이는 좋은 출발선상에 선다. 미래에 어른이 되고 나서도 고분고분 세상에 순응하며 살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 마지막으로, 옥자의 목소리에 숨은 비결이 있다고.
“‘괴물’의 괴물은 오달수 선배가 목소리 연기하지 않았나. 옥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배우 이정은씨다. 휠체어 탄 환자 역으로 영화에도 몸소 특별출연했다. 뮤지컬 공연도 하실 만큼 목소리 컨트롤에 탁월하다. 옥자 목소리를 부탁드렸는데, ‘하루 종일 돼지 다큐멘터리를 봤다’면서 죄송할 만큼 깊이 몰입해주셨다. 돼지 소리는 호흡을 들이마시면서 내야 한다. 거기에 감정까지 실어야 하니 정말 힘들었을 텐데, 섬세하게 표현해 주셨다. 연기가 필요한 부분은 이정은씨가 하고, 나머지는 ‘설국열차’를 함께한 ‘반지의 제왕’ 시리즈(2001~2003) 사운드 디자이너 데이브 화이트헤드가 작업했다. 뉴질랜드‧호주의 특수 종 돼지들의 다양한 소리를 따서 이정은씨의 목소리 연기와 믹싱했다.”
제70회 칸국제영화제 현지 리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