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당선인의 아버지는 함경도 흥남 출신이다. 전쟁 중 미 군선을 타고 월남해 거제에 정착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인 ‘흥남 철수’ 때였다.
'흥남 철수' 피란민 아들로 태어나
경남고 수석 입학, 사법연수원 차석
시위 경력 탓에 판사 못 되고 낙향
노동자 편에선 인권변호사로 활동
"노무현의 부탁" 재수 끝 대통령 돼
가난했던 유년 시절과 사법시험 합격
문 당선인이 대학에 입학한 그해 10월 박정희 정권은 ‘유신’을 선포했다. 삶의 갈래에서 그는 고시 준비 대신 유신 반대 시위를 선택했다. 1975년 4월 인혁당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하자 다음날 대규모 학내 시위를 주도한 끝에 체포돼 서대문구치소에 구속·수감됐다. 학교에서도 제적을 당했다.
문 당선인은 “교도소로 송치되던 날 호송차 철망을 통해 어머니를 봤다. 나를 보고 막 뛰어오며 손을 내미는 데 차는 점점 멀어져 가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제대 후엔 부친상을 겪었다. 문 당선인은 49재를 마친 다음날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어가 고시공부에 몰두했다. “뒤늦게나마 한 번이라도 아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듬해인 1979년 문 당선인은 바램대로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 뒤 다시 시위로 구속 돼 계엄령 위반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2차 시험 합격증은 그래서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3차 면접 시험을 앞두고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이 “데모할 때와 생각이 같은가”라고 물었을 때도 그는 “내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82m 크레인 변론’ 인권 변호사
문 당선인은 그때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꾼 사람도 만났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80년대 후반 부산에선 안기부의 요시찰 대상 재야 인권 변호사가 4명 있었다. 그와 김광일ㆍ이흥록,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이었다.
검은 봉투에 속옷만 챙긴 민정수석
문 당선인은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청와대를 다시 나왔다. 총선에 출마하라는 주변의 성화 때문이었다. 재야로 돌아와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던 그는 노 전 대통령 탄핵 소식에 변호인단 간사로 ‘컴백’했다.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문 당선인이 국장(國葬) 상주를 맡았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국장에 참석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백원우 전 의원이 “여기가 어디라고…. 사죄하시오”라고 소리치다 끌려나가기도 했다. 문 당선인 이 전 대통령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리고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저서『닥치고 정치』에서 “타고난 애티튜드(Attitudeㆍ태도)의 힘을 느꼈다”고 적었다. 문 당선인은 이후 재단법인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았다.
최다득표 낙선, 위기론이 대세론으로
같은 해 18대 대선에 출마한 문 박근혜 전 대통령과 맞붙었다. 문 당선인은 당시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해 야권 후보로 나섰다. 역대 당선자를 능가하는 득표(1469만 표ㆍ48%)를 했지만 결국 낙선의 쓴잔을 마셨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선 패배의 반성문 격인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노무현을 넘어서는 것이 그의 마지막 부탁이라는 것을 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문 당선인은 이후 차기 대선 주자로 본격적인 경력을 쌓아 나갔다. 2015년 초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로 선출됐다. 하지만 재ㆍ보선에서 패배하고 안철수 전 대표가 탈당해 따로 국민의당을 만드는 등 위기가 이어졌다. “사퇴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친문(親文, 친 문재인)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온 나라를 충격에 몰아 넣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며 문 당선인은 유력 대선 주자 자리를 굳혔고, 지난 4월 3일 당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문 당선인은 19대 대선 전 여러 자리에서 “삼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9일 대선에서 승리하며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문 당선인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약 2개월 간 ‘공석’이었던 대통령 직을 이어 받아,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게 된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