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서소문 포럼] 트럼프가 미국의 가치 외교를 접는다는데 …

중앙일보

입력 2017.05.06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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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라이팅에디터·외교안보 선임기자

지금은 사흘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 집중돼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에너지는 두 개의 광장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촛불광장과 태극기광장이다. 그중 태극기광장엔 미국 국기인 성조기가 콜라보 작품처럼 펄럭였다. 성조기가 거기 왜? ‘박근혜 옹호=보수=안보=한·미 동맹’ 뭐 이런 도식의 메시지인가 생각하고 지나갔다. 최근 미국 정치권에 정통한 재미 인사가 이런 얘기를 했다. “미국 의회 내 지한파 의원들, 학자들이 꽤 불편해했다. 탄핵 반대 집회에 성조기가 등장한 게 반미 정서를 촉발할 것 같다고. 내렸으면 좋겠다고.”
 
미 행정부의 정책 입안자나 정치인들에게 반미 정서는 민감한 이슈다. 한·미 동맹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다. 2002년 효순·미선양 사고 때 그 휘발성과 폭발성을 경험한 바 있다. 한·미 두 나라는 외교 현안을 다룰 때 국민 감정에 미칠 영향도 고려한다. 상대 국민의 정서까지 고려하는 건 최근 국제 외교의 기본이기도 하다. 한·미 동맹은 미국의 지정학적 이익 차원을 넘어선다. 미군 3만7000명이 자유수호를 명분으로 싸우다 희생된, 현재도 위협이 상존하는 한국의 안보를 지키는 피의 동맹이다. 한·미 동맹을 군사동맹이란 말과 함께 ‘가치 동맹’으로도 부르는 이유다.

협상가 트럼프의 눈엔 가치 동맹, 반미 정서 고려 없어
시진핑·아베보다 늦은 우리 치밀하되 쿨하게 해야

미국은 가치 외교를 관습처럼 구사해왔다. 특히 우드로 윌슨 대통령(1913~21년 재임) 이래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평화와 안전 등의 가치를 국제사회에 투사해 왔고, 한편으로 이를 국익 확대의 외교 툴로 활용했다. 국내 테러범 고문 등 이중잣대 논란이 일긴 하지만 유럽과 함께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제고하는 긍정적 역할을 해왔다. 그게 미국을 수퍼파워로 만든 힘이기도 했다.
 
그런 미국의 가치 외교가 희미해지고 있다. 부동산 투자자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전부터 예견된 현상이다. 마약범 소탕을 빌미로 1년 사이 7000명을 살해한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청하고, 북한 김정은에겐 군사 공격을 시사하면서도 ‘적절한 조건에서 대화하면 영광’이라고 했다. 미국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미 지도층과 여론의 비판은 개의치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비용을 한국에 청구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재협상하겠다고 돌출 발언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혈맹 한국, 한국민의 정서 같은 건 고려 사항에 없는 듯하다. 북핵 문제 몰입도 중국을 길들이면서 ‘레거시(업적)’를 창출해낼 협상 아이템 중 하나뿐일 수도 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최근 직원 대상 강연에서 가치 외교를 뒤로 물리고 있음을 시사했다. “인권과 자유는 변하지 않는 미국의 가치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우리가 오랜 역사를 거쳐 도달한 이 가치를 따라야 한다고 너무 과도하게 조건을 걸면 우리의 안보적·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장애가 된다.” 미국의 국익 비즈니스를 위해 인권은 눈을 감아줄 수 있다는 얘기다. 틸러슨도 외교관이나 학자가 아니라 석유기업 엑손모빌 최고경영자(CEO) 출신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론 독재체재 반대·인권옹호 등 인류보편의 가치를 국제 이슈에 대입해온 미국은 이제 자국민만 잘살고 잘 먹으면 된다는 ‘자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국가로 단순화됐다. 틸러슨 국무장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이 ‘철갑 같은(ironclad) 한·미 동맹’을 얘기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역대 정부와 다른 점은 분명해 보인다.
 
취임 100일 사이 한국에 앞서 트럼프 ‘쇼크’를 받은 나라는 일본(미국의 TPP 탈퇴), 멕시코(국경 장벽 건설), 캐나다(우유 관세 보복) 등 수없이 많다. CNN은 4일 일본과 영국·이스라엘, 심지어 팔레스타인의 정상들이 트럼프와의 회담에서 현란한 아부 행보를 하며 트럼프의 정책 전환을 이끌어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의 뇌에는 시진핑과 아베 버전의 동아시아 정세가 이미 입력돼 있다. 늦게 시작하는 한·미 정상회담, 다행으로 생각할 건 트럼프 행정부의 성격을 알 만큼 알고 시작한다는 거다. 대신 치밀하되 쿨하게 하자. 아부로 비쳐질 만큼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도 국익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김수정 라이팅에디터 외교안보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