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소인왕국의 토끼 같은 대선후보들이 저 거칠기 짝이 없는 강대국 맹수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세계 정치를 장사꾼 논법으로 확 바꾼 트럼프, 의뭉스럽지만 뒤끝 작렬하는 시진핑, 전리품 챙기는 데에 이골이 난 아베, 그리고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푸틴. 국제정치에 작동하던 우호적 이성을 다 팽개친 강대국 맹수들 사이에 대선후보 중 누구를 갖다 놔도 그림은 초라하다.
이번 대선의 뇌관은 안보보다는
화난 국민, 즉 ‘분노한 민심’이다
‘촛불의 분노’와 ‘태극기의 분노’
누가 잘 대변할지가 최대 화두
유권자는 투표소에 줄 서겠지만
누가 되든 책임정부와 거리 멀어
중국에 뺨 맞고 미국에 돈 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 없어 나 홀로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대선정국 토론회다. 그럼에도 각 진영은 표심 동향에 신경줄을 놓지 못한다. 트럼프의 파렴치한 비용청구서가 사드 필수론을 주장해 온 보수후보 지지층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철통 안보에는 돈을 낼 수밖에 없다는 수용론자와, 그럴 바엔 득실을 따져보자는 실속파, 자존심이 무척 상한 분개파로 쪼개질 조짐이 커졌다. 실속파와 분개파가 보수진영을 떠난다면 최대 수혜자는 사드 재협상론자 문재인, 그다음은 조건부 수용자 안철수다. 느닷없이 불어닥친 트럼프 태풍, ‘트풍(風)’이 사드 원칙적 반대론자 문재인의 입지를 넓혀준 건 이번 대선의 최대 아이러니로 기억될 것이다.
이 밑그림을 바꿀 시간적 여유가 없는 ‘허둥지둥 대선’에서 정책공약을 눈여겨볼 유권자도 그리 많지 않다. 정치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시간이 넉넉해도 유권자들은 정책공약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공약이 아니라 후보의 이미지다. 자신의 욕망에 맞는 자기 예언적 상징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사람에게 표를 던진다. 미국과 영국에서조차 공약 때문에 지지후보를 바꾼 비율은 10%도 지나지 않고, 특정 정책이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식별하는 사람도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의 경우 다섯 후보가 쏟아놓은 정책 메뉴를 일일이 간별해 투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컨대 ‘기초연금 모두에게 30만원’과 ‘하위 80%에게 30만원’이 무슨 표심의 차이를 가져올까. ‘촛불의 분노’와 ‘태극기의 분노’를 누가 잘 대변할까, 이게 19대 대선의 최대 화두다. 정책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기대와 이미지다. 여기에 사드로 상징되는 안보 열병이 살짝 가세했을 뿐이다. 분노는 트풍보다 힘이 세다.
그런데 이런 표심으로 출현할 정권은 과연 ‘모든 국민’의 열망에 화답하는 ‘책임 정부’일까? 민주주의 이론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이론을 배반한다. 역대 최다 득표 박근혜 정권이 그랬다. 이번에는 역대 최소 득표 당선자다. 더욱이 국운이 걸린 중대 사안을 좌우할 실세들은 후보 뒤에 익명으로 숨어 있다. 그들이 누군지도 모른 채 일주일 후 투표소에 줄을 설 것이다. 누가 되든 책임 정부와는 거리가 멀다.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