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축구 방북취재 르포 '평양은 거대한 극장'

중앙일보

입력 2017.04.13 03:00

수정 2017.04.13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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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을 든 여성 응원단들이 7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남북한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전에서 응원을 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서울과 평양의 직선거리는 채 200㎞가 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전주까지와 비슷한 거리다. 자동차로 두 세 시간이면 오갈 수 있다. 하지만 육로와 항로가 모두 닫힌 현재 서울에서 평양으로 건너가는 방법은 사실상 중국을 경유하는 루트 뿐이다.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아시안컵 예선 B조 취재를 위해 평양으로 향할 때도 이 길을 따랐다.
 
세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를 30시간 걸려 이동했다. 지난 2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중국의 베이징으로 건너간 뒤 하루를 머물며 비자를 발급 받고 다음날 평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30시간이면 남미 대륙까지 건너갈 수 있는 시간이다. 분단의 벽은 태평양보다 넓었다.

한국 취재진에 철저히 연출한 상황만 보여줘

여자축구대표팀 선수단과 스태프, 취재기자단을 포함해 50여 명을 태운 비행기가 3일 오후 평양 순안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지난 2012년에 새로 지었다는 공항 청사였다. 김부자 초상화 없이 공항 상단에 '평양'이라는 붉은 글씨 간판만 심플하게 걸려 있었다. 규모는 한국의 중소도시 공항 정도였다. 평양이라는 글자와 낯선 색상의 고려항공 여객기가 없었다면 북한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평양순안국제공항 출입구. 규모는 국내 지방공항 수준이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처음 마주한 북한 사람은 통로 입구에 서 있던 여성 보안원이었다. 인사를 해야할 지, 눈을 맞춰야 할 지 잠깐 망설이다 가볍게 목례를 하곤 걸음을 재촉했다. 입국심사장에 쓰인 '위생실(화장실의 북한식 표현)'이라는 글자에서 다시 한 번 북한에 도착했음을 느꼈다. 황토색 북한 군복을 입은 보안원이 "축구 때문에 오셨지요"라며 살짝 미소지을 때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짐 가방을 열어보며 내용물을 꼼꼼히 살피는 보안원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중년의 아저씨였다. 황토색 제복과 왼쪽 가슴에 달린 김일성 부자의 뱃지가 없었다면 거부감이 덜했을 지 모른다. 

취재진 도운 민화협, 한국 정세 관심 보여
대선, 세월호, 최순실 등 관심사 질문 세례


게이트를 빠져나온 뒤 만난 북한 관계자들은 한국 취재진을 모아놓고 자신들을 '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 참사'라고 소개했다. 출국 전 통일부 관계자가 "연락관이라 부르는 북한 관계자들이 취재는 물론, 사소한 행동들까지 꼼꼼히 통제하거나 지원할 것"이라 설명한 게 떠올랐다. 이들 중에는 통일전선부나 보위부에서 대남 활동을 하는 조직의 관계자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일 평양 시내 한 결혼식 식당에서 결혼을 마친 신혼부부와 하객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일정상의 자유는 없었다. 매일 아침 식사를 마치면 선수단과 동행한 통일부 관계자들이 당일 일정을 결정해 기자단에 통보했다. 오후 즈음 훈련이나 경기 일정에 맞춰 호텔 로비에 모인 뒤 버스를 타고 함께 이동하는 게 일과였다. 외부에서 점심식사를 할 경우 출발 시간이 조금 앞당겨지는 정도였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민화협 사람들과 자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한국 정치 상황에 큰 관심을 보였다. 대선 진행 과정, 세월호 사건, 최순실 스캔들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질문을 쏟아냈다. 이들은 통상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6시30분에 퇴근하는데, 한국 뉴스를 보는 게 자신들의 일이라고 했다. 북한 관계자들은 "선생도 광화문에 나가보셨습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촛불시위를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은지, 지난 선거에선 누구를 뽑았는지, 이번 선거에는 누굴 뽑을 건지 등등 질문이 이어졌다.
 
이들은 한국 국내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안철수 선생이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선생을 많이 따라잡은 것 같던데요", "박근혜가 탄핵을 당했는데, 그럼 탄기국(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은 어떻게 되는 겁네까" 등 제법 구체적인 질문이 나왔다.

김정은을 찬양하는 입간판을 설치한 평앙 시내 건물. 평양=사진공동취재단

TV서 김부자 우상화 관련 프로그램, 온종일 방영
 
평양은 거대한 극장 같았다. 평양 체류기간 틈틈이 북한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지만 전부는 아니었고 모두가 진실도 아니었다. 북한측은 기자단의 이동 경로를 ▶김일성-김정일을 찬양하는 대형 선전 문구가 걸린 곳 ▶고층 빌딩이 많은 곳 ▶신식으로 꾸며진 거리 등으로 철저히 제한했다. 버스 기사는 15분이면 갈 수 있는 최단코스 대신 번화가를 두루 거치며 30분이 소요되는 코스를 항상 선택했다. 숙소 호텔(양각도국제호텔) 역시 외국인 전용 시설이라 평양의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순 없었다. 평양 체류 기간 내내 북한의 의도가 충실히 담긴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양각도호텔은 서울로 치면 여의도에 들어선 고층 건물이다. 대동강 한 가운데 있는 양각도에 47층 높이로 세워져 있다. '105류경호텔'로 불리는 피라미드 모양의 건축물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는 민화협 관계자의 설명이 따라왔다. 1990년 남북통일축구에 남측 대표선수로 출전한 윤덕여 여자축구대표팀 감독이 방북전 만난 자리에서 "27년 전에도 류경호텔은 공사 중이었다"고 말한 게 떠올랐다.

지난 7일 여자축구 남북대결이 열린 평양 김일성경기장 전경. 김부자의 초상화가 경기장 벽면에 그려져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평양에서 류경호텔과 양각도호텔, 주체사상탑은 어디서든 시야에 들어오는 랜드마크다. 대동강변을 따라 자리한 과학자거리에도 '인재중시 과학중시'라는 구호가 적힌 고층 빌딩들이 늘어서 있다. 도로는 깨끗했고 차는 많지 않았다. 인민복을 입은 시민들이 부지런히 걸어다니는 평양 시내의 모습은 중국의 소도시를 연상시켰다.
 
평양은 흑과 백이 대비를 이루는 도시였다. 호텔 방 창문으로 보이는 쪽과 방이 배치되지 않은 반대쪽의 경치가 확연히 달랐다. 한쪽은 대동강을 따라 늘어선 고층빌딩이 이채로웠고 다른 한쪽은 앙상한 시멘트 건물의 조합이었다. 시내에는 상업광고판 대신 북한의 체제를 선전하는 글귀들로 가득했다.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가 가장 많았다. 김정은을 찬양하는 문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북한 기자가 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전에서 인도를 10-0으로 이기고 기자회견을 하는 윤덕여 감독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뒤로 김부자의 초상화가 보인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북한 TV 채널은 조선중앙티비가 유일하다. 외국인이 묵는 호텔방에는 중국 CCTV는 물론, 중동 뉴스채널 알 자지라까지 볼 수 있지만 북한 주민들이 자주 오가는 호텔 로비와 식당의 TV는 오직 조선중앙티비 화면만 보여줬다. 평일의 경우 오후 3시부터 시작하는 조선중앙티비 프로그램은 김부자 삼대를 미화하는 다큐멘터리나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옥류관 녹두전, 30년 전문가의 노하우 담은 '작품'
 
북한 사람들에겐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다고 했다. 평양에서 만난 이들은 대부분 "학창시절, 혹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 무렵 얻은 직업이 평생 직장이 된다"고 설명했다. 호텔 식당의 봉사원(종업원의 북한 명칭)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장철구평양상업종합대학 출신들이었다. 이 학교에서 봉사학부, 료리(요리)학부, 호텔경영학부 등을 전공한 이들은 학창 시절 배운 내용에 맞는 직업을 가진다고 한다. 호텔이나 공항 식당에서 만난 봉사원들에게 "평양상업대학 봉사학부 나오셨나요"하고 물으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사들은 십중 팔구 평양상업대학 료리학부 출신들이다.
 
지난 5일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음식점 옥류관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냉면과 함께 나온 녹두전은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는데, 봉사원은 "30년 동안 녹두전만 만든 료리사의 손맛"이라고 설명했다. 김일성경기장 인근 개선문에서는 무려 35년간 가이드로 일했다는 중년 여성을 만났다. 그는 1982년 김일성의 70번째 생일에 맞춰 건립한 개선문의 역사, 새겨진 문양 및 숫자의 의미를 녹음기처럼 술술 풀어냈다. 개선문 아치 위에 새겨진 김일성 찬양 노래도 불렀다.
 

평양냉면의 원조인 옥류관의 오은하 봉사원이 예쁜 한복을 입고 방북 취재진에게 냉면 먹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옥류관에서 판매하는 오리지널 평양 냉면.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직업 뿐만 아니라 살 곳을 정하는 일도 북한 당국의 몫이라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은 토지와 부동산이 모두 국가 소유다. 고층 아파트든, 저층 주택이든 나라에서 배정한 집에서 살아야 한다. 집의 규모는 대개 가족의 규모와 비례한다고 북한 관계자가 설명했다. 생활 환경을 바꾸기 위해 이사를 한다는 건 북한에선 불가능이다.
 
 
인터넷 접속은 자유로운 편이었다. 카카오톡을 비롯해 페이스북, 구글, 뉴욕타임스, 인스타그램 등에 불편 없이 접속할 수 있었다. 네이버 등 국내 포털사이트도 접속이 가능했지만 메인 화면 이후로는 진행이 되지 않아 국내 소식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무선인터넷 서비스는 없었고 랜선을 활용하는 유선 연결 방식이었다. 평양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아이디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가 한 곳 뿐인지 호텔에서 발급받은 아이디로 김일성경기장에서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취재진은 중국 베이징의 한국대사관에 휴대폰을 맡겨놓고 평양에 건너왔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활용한 로밍이나 인터넷 사용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민화협 관계자들에게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물론 되지"라는 심플한 답이 돌아왔다. 이와 관련해 평양에 머무는 중국 특파원은 "유심카드를 장착한 스마트폰은 메신저 어플리케이션이나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북한 축구팬들, 경기 결과 및 대진에 맞춰 관심 고조
 
 남북대결이 열린 김일성경기장 관중석 분위기는 북한대표팀이 경기를 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확연히 달라졌다. 지난 7일 남북전 당일에는 경기장을 가득 메운 5만 명의 관중들이 조직적인 응원을 선보이며 우리 대표팀에 적대적인 분위기를 뿜어냈다. 우리 선수들이 공을 잡을 때마다 떠나갈 듯한 야유가 쏟아졌다. 전반 5분 골키퍼 김정미(인천현대제철)가 북한의 페널티킥을 막아낸 직후 북한 선수와 충돌해 양팀 선수단이 신경전을 펼칠 땐 관중석 분위기도 험악했다.  

'2018 여자아시안컵' 예선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기가 열린 7일 오후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양팀 선수들이 공중볼을 다투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반면 남북전 이외의 경기에선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한 실수 장면이 아닌데도 관중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평소 오락거리가 적은 북한 관중들은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며 집중했다. 지난 5일 북한-홍콩전에 이어 열린 한국-인도전에는 장대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5000여 명의 홍콩전 관객 중 절반 이상이 그대로 자리에 남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북한은 A매치 등 주목도가 높은 축구경기를 대부분 김일성경기장(5만석)과 5월1일경기장(15만석)에서 치른다. 북한프로축구 1부리그는 15개팀이 참여하며 4.25체육단, 기관차, 횃불체육단 등이 있다. 1부리그 팀들은 만경대상, 백두산상, 보천보횃불상 등의 이름이 붙은 각종 대회에 출전한다. 결승전은 대개 김일성경기장과 5월1일 경기장에서 번갈아 가며 열린다고 한다.

김일성경기장과 5월1일경기장은 지난 2000년대 중반 이후 운영 비용 절감과 경기장 관리 편의를 위해 그라운드를 인조잔디로 교체했다. 김일성경기장은 지난해 10월 전면 개보수했고 5월1일경기장은 지난 2013년 새로운 인조잔디를 설치했다. 평양 체류 기간 중 두 경기장 잔디를 모두 밟아 본 여자대표팀 주장 조소현(현대제철)은 "5월1일 경기장은 생각보다 더 웅장한 것 같다. 느낌이 다르다"며 "김일성경기장은 인조잔디의 길이가 길다. 인조잔디 품질은 한국과 비슷하다. 캐나다에서 열린 여자월드컵 당시의 인조잔디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전했다.평양=공동취재단, 정리=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