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었다. 중국 남부의 첫 개방 도시 중 하나인 샤먼(厦門)에서도 ‘사드 보복’은 여지없이 우리 기업을 괴롭혔다. 현지에서 16년째 사업을 하고 있는 한 투자회사의 K법인장이 전하는 분위기는 이랬다.
더 거칠어지는 중국의 경제 보복
홍색공급망에 막혀 수출도 타격
크고 강해지는 중국 산업 생태계
각종 외국기업 규제는 예상된 일
기술력 없는 ‘스파링 파트너’는
이제 링에서 쫓겨날 처지 돼
물러설 수 없는 11조 달러 시장
앞으로 믿을 건 기술 경쟁력뿐
수교 25년 만에 드러난 중국의 민낯이다. 그는 “중국 비즈니스 16년, 중국에서 쉽게 돈 버는 시대는 이제 끝나 가고 있다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사드 문제가 어떻게 끝나든 ‘포스트 사드(Post-THAAD·사드 이후)’ 시대엔 경쟁력 없는 상품이나 서비스는 중국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변두리 상품부터 무너지는 수출 전선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기술수준이 높아진 중국은 어지간한 중간재는 이제 중국 내에서 다 조달한다. 부품, 조립, 완제품 생산, 수출(또는 내수 소비)에 이르는 완결된 제조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홍색공급망(Red-supply-chain)’이다. 중국의 자국산 중간재 투입 비중은 2004년 이후 꾸준히 증가해 62.9%에 이르렀다.(현대 경제연구원) 당연히 한국에서 들여가는 중간재 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사드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대(對)중국 수출에는 이미 경고등이 켜지고 있었다. 통계가 말해준다.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출은 2014년 이후 연속 3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1244억 달러로 전년보다 9.3% 감소했다.
정환우 KOTRA 중국 조사담당관은 “대중국 수출 상위 12개 품목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어서는 등 품목 집중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며 “이는 경쟁력 변두리에 있는 상품이 하나둘 중국 수출전선에서 밀려나고 있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경쟁력 없는 제품은 중국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K법인장의 말이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최근 발표한 ‘중국의 외자유치 정책과 규제’ 보고서를 통해 “일부 철강, 화학제품 등에 대한 반덤핑 조사나 식품, 화장품 등에 대한 통관 지연 등은 사드 배치가 이슈화되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취해져 온 조치들”이라며 “사드가 아니어도 어차피 닥쳐 왔을 일”이라고 강조했다. 사드는 빌미였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 연구위원은 “중국의 산업 발전 단계에 따라 외자기업 정책도 달랐다”고 분석한다. 중국 산업은 아무런 기반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작은 기업이 등장하는 ‘소(小)’ 단계, 산업 생태계를 조성해 기업을 크게 키우는 ‘대(大)’ 단계, 그리고 해외로 진출하는 ‘강(强)’ 단계로 발전한다. 강(强)의 단계로 높아질수록 외자기업에 대한 우대는 낮아지지만 규제는 높아진다. 더 이상 넘겨줄 기술이 없는 외자기업은 중국에서 찬밥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문제는 지금 중국의 대부분 산업이 자국 완결형(full-set) 생태계를 형성하는 대(大)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일부 산업은 해외에 나가 인수합병(M&A)에 나서는 강(强) 단계로 진입하기도 했다. 이미 충분한 기술력을 확보했기에 중국은 외국기업에 대해 ‘나갈 테면 나가라’식의 배짱을 부릴 수 있다. 전기자동차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이철용 연구원위원의 설명이다. 한국의 배터리 업체들이 중국에서 당한 근본 이유는 사드가 아닌 중국의 산업 정책 때문이라는 얘기다. 중국은 힘을 축적했다고 판단하는 순간 ‘넌 더 이상 나의 스파링 파트너가 아니야’라며 링에서 몰아낸다. 어정쩡한 기술로 중국에서 버티기는 불가능해졌다.
현대차의 지난 3월 판매량이 사드 영향으로 거의 반 토막 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작이다. 판매량이 얼마다 더 줄어들지 가늠하기 어렵다.
일본 도요타 역시 2012년 중·일 갈등으로 타격을 받았다.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는 데 5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건 기술력이 받쳐준 도요타 얘기일 뿐, 경쟁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현대차의 회복은 더 길어질 수 있다. 맹렬하게 기술을 추격해 오고 있는 중국 로컬 자동차 업체도 부담이다. 아예 퇴출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일부 우려가 제기된다.
‘사드가 준 선물?’
쉽게 돈 버는 시대가 끝났다면, 향후 중국 비즈니스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전문가들은 중국 내에서 형성되고 있는 ‘홍색공급망’의 빈틈을 노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한진 KOTRA 타이베이 관장은 “중국의 자체 기술력이 높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공급사슬에 분명 기술 허점이 존재한다”며 “그들이 갖추고 있지 못한 분야, 허술한 분야를 찾아내 공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 산업, 기업별로 중국의 서플라이체인을 연구하고, 내가 참여(input)할 수 있는 기술과 서비스를 만들라는 충고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기술 역량이 있는지의 여부다. 과거 우리는 중국이 요구하는 기술을 내어주면서 시장을 얻었고, 그 돈으로 기술개발을 해 밸류체인의 고부가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발 여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오히려 중국에 쫓긴다. 중국은 ‘중국제조 2025’라는 국가 제조업 혁신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정부와 기업이 총력 돌진하고 있다. 모바일 인터넷 등 신흥 산업에서는 이미 우리를 추월했다. 중국 시장과 교환할 수 있는 우리 기술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드 문제가 제기된 후 ‘시장 다각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말이 쉽지, 하루아침에 이뤄질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중국은 우리보다 10조 달러나 많은 11조4000억 달러의 경제 규모를 갖고 있는 시장입니다. 어쨌거나 매년 6~7% 성장합니다. 많은 경우 동남아로 진출하더라도 원부자재를 중국에서 가져다 써야 합니다. 이웃 중국에서 밀리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황재원 KOTRA 경제외교사업팀장)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기술력으로 다시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방법을 다 알고 있다. 정부는 기업이 마음껏 기술개발에 나설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인재 양성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 서방의 선진 기술업체가 한국으로 와 중국을 향한 산업기술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비즈니스 인프라를 깔아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창업 공간을 마련해주고, 실패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제도를 짜는 것도 시급한 일이다. “방법은 알지만 실행이 안 되고 있는 것,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드가 드러낸 민낯, 그건 “경쟁력 없는 한국 기업들은 이제 중국에 발도 들일 생각 말라”라는 경고와 다름없다. 이를 직시하고, 우리 산업의 경쟁력 강화로 연결한다면 사드가 나름 의미 있는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차이나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