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앉은 촛불·태극기 “모두 나라 위한 것, 정치권 이용 말라”

중앙일보

입력 2017.03.23 02:28

수정 2017.03.23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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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 검찰 나온 날, 양쪽 집회 참가자 즉석 토론 
 
둘로 갈라진 광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은 21일에도 재연됐다. 이른 아침부터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정문과 서문 쪽에 각각 이른바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이 모였다. “구속하라” “탄핵무효” 같은 정반대 구호가 울려 퍼졌다.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 삼거리에선 한때 두 집회 참가자 50여 명이 뒤섞이며 욕설이 오갔다. 몸싸움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다. 경찰이 제지해 충돌은 피했지만 몇 달간 대립하며 깊어진 감정의 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로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까. 집회를 취재하다 ‘즉석 토론’을 떠올렸다. 서로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핵 무효 집회 김기현씨
박근혜 때리기만 매달리지 말자
최순실 잘못, 대통령에 뒤집어씌워
30대 두 아들과 대화 안 통해
대선서 누가 당선되든 인정해야
광화문광장서 커피 얻어먹고 싶어

구속 촉구 집회 천창룡씨
태극기측 왜곡된 정보를 진실로 여겨
탄핵 깨끗이 인정하고 새 시작을
태극기 어르신들도 우리의 이웃
추운데 고생하시는 것 알아
커피든 술이든 환영, 한잔

‘태극기집회’ 참가자 김기현(63·왼쪽)씨와 ‘촛불집회’ 참가자 천창룡(52)씨가 21일 두 집회 장소 중간 지점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토론을 벌였다. [사진 여성국 기자]

탄핵 무효 집회 참가자 김기현(63)씨와 구속 촉구 집회 참가자 천창룡(52)씨가 현장에서 제안에 응했다. 대화를 위해 양쪽의 거센 구호 소리를 피해야 했다. 중앙지검 서문 앞에 있던 김씨와 동문 앞에 있던 천씨를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나도록 했다. 집회 속에 섞여 있을 때는 거칠어 보였지만 마주 앉은 그들은 예의를 갖춰 악수를 나눴다. 물론 두 사람이 양 집단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진행됐다.
 
-집회엔 얼마나 자주 나왔나. 양쪽 집회에 대한 생각은.
천=“촛불집회 시작부터 끝까지 참여했다. 사람마다 각자 생각이 다르니 다른 사람은 ‘친박 집회’에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쪽 참가자들이 왜곡된 정보를 진실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돈 받고 집회에 나온다거나 관제데모라는 보도도 있지 않았나. 그런 사람이 진짜 없는 것인지 여전히 궁금하다.”


김=“돈 받고 나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다수는 절대 아니다. 촛불집회는 뉴스나 영상으로 봤다. 자기주장이 있는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작은 잘못을 가지고 지나치게 밟으려 하는 것 같다.”
 
-탄핵소추부터 파면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어떤 생각이 들었나. 
김=“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인데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국가적으로도 그렇다. 지금까지 과정을 보면 국회의원, 특히 여당이었던 이들이 탄핵소추에 참여하면서 여기까지 달려왔다. 이 지경이 된 것은 바른정당 쪽 탓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야당은 야당으로서 일을 한 거니까. 또 모든 일이 처음부터 대통령 구속을 향해 달려온 것 같다. 탄핵소추, 파면 모두 그렇다.”
 
천=“나는 경남 거제가 고향이다. 전통적인 ‘1번’ 지역이다. 깃발만 꽂으면 된다. 그러다 보니 부패가 많다. 그래서 사회운동가로 살게 됐다.”
 
김=“잠깐, 호남이 아니라 경남 사람인가. 거제도면 조선소 다니는 민주노총 조합원도 많겠다. 그 사람들 너무 과격한 것 아닌가.”
 
천=“민주노총에 대해 반감이 있는 것도 알지만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탄핵은 당연한 결과였다. 재판관 8명 다 이념 성향이 다르지 않나.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법과 정의가 살아 있다면 8대 0의 결과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 법과 원칙에 따른 판결이었다.”
 
-박 전 대통령 구속 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김=“분위기는 구속될 것 같다. 나는 절대 구속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너무 대통령 때리기에만 매달리는 것 아닌가 싶다.”
 
천=“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박 전 대통령이 문제의 몸통이다. 구속해 낱낱이 밝혀야 한다.”
 
김=“이 사건은 분명 최순실 게이트다. 대통령에게만 지나친 책임을 지우면 안 된다. 헌재 결정도 문제다. 법리 검토는 7~8명이 할 수 있지만 판결은 9명이 엄격하게 해야 한다. 구속도 마찬가지다. 최순실의 잘못인데 대통령이 알지 못한 부분까지 다 뒤집어씌우려 한다.”

‘태극기집회’ 참가자 김기현(63·왼쪽)씨와 ‘촛불집회’ 참가자 천창룡(52)씨가 21일 두 집회 장소 중간 지점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토론을 벌였다. [사진 여성국 기자]

 
-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은.
김=“대한민국이 너무 분열됐다. 앞으로는 박근혜 때리기를 그만하고, 대선 가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해야 한다. 누가 나올지 모르지만 상대 후보도 인정하자. 문재인이 당선된다고 나라 말아먹겠나. 상대 후보가 돼도 나라는 안 망할 수 있다. 공정하게, 페어플레이했으면 좋겠다.” 
 
천="여야, 진보·보수를 떠나 큰 틀에서 대한민국이 잘되는 걸 바란다. 잘못해서 80~90% 국민이 탄핵을 바란 것 아닌가. 이건 깨끗하게 인정해야 한다. 물론 태극기집회를 볼 때 안타까움도 많다. 다 같은 국민 아닌가. 특히 거기엔 어르신이 많지 않나. 동의는 못해도 추운데 고생하시는 건 안다. 문제는 이 갈등을 이용하는 정치인이 보수·진보할 것 없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야권이라고 무조건 좋아하고 지지하지는 않는다.” 


김=“그쪽은 누구를 지지하나? 문재인 대세론이 있지만 주변에서 안희정이 낫다는 말도 하던데.” 
 
천=“안희정도 좋지만 개인적으론 이재명을 지지한다.” 
 
김=“내가 분당에 산다. 이재명 시장 얘기를 많이 들어 잘 안다. 아무튼 누가 당선되든 선거는 국민이 많이 찍으면 원치 않는 결과가 나와도 인정해야 한다. 이미 대립이 너무 심하다. 태극기집회에서 몇몇 사람이 ‘전자개표기를 조작해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런 말 하는데, 너무 지나치다. 공정한 룰에서 경쟁하고 서로 믿을 줄도 알아야 한다.”
 
천=“박 전 대통령이 진심으로 사죄해 분열된 국민의 마음을 달랬으면 한다. 벌 받을 건 받고 새롭게 시작했으면 좋겠다. 진보와 보수, 촛불과 태극기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
 
-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은.
김=“30대 아들 둘이 있다. 나랑 (생각이) 반대라 소통이 잘 안 된다. 아예 얘기를 잘 안 하려 한다. 무조건 반대라고 단정 짓지 말고 서로 노력했으면 좋겠다. 우리랑 얘기하기 싫은 건 알지만 얘기를 시작해야 계속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까. 상처 입고 태극기집회에 나온 사람들도 좀 생각해 줬으면 한다.”
 
천=“태극기집회 어르신들도 우리 이웃, 지인이다. 그분들이 가진 박정희에 대한 향수도 이해한다. 순수함과 왜곡이 공존하는 것 같다. 나도 요즘 소통이 너무 안 돼 가슴이 아프다. 길을 지날 때 이유 없이 촛불, 태극기라며 적대시하고 무턱대고 비난하는 게 문제다. 지금 이분과 얘기하면서 저쪽에도 합리적인 분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토론이 끝나고 두 사람은 15분 정도 더 남아 얘기를 나눴다. 김씨는 “광화문광장에 커피 얻어 마시러 가겠다”며 천씨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천씨도 “환영한다. 커피든 술이든 한잔했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두 사람은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카페를 나섰다. 
 
글, 사진=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