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외면한 여성 영웅
흔히 ‘우주 탐사’하면 닐 암스트롱(1930~2012) 같은 백인 남성 우주비행사를 떠올리지만, 그 뒤에는 ‘흑인 컴퓨터’라 불린 20여명의 흑인 여성 수학자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미·소간 우주 경쟁이 치열했던 60년대 NASA에서 비행 궤도나 착륙 지점을 손수 계산하는 ‘인간 컴퓨터’로 활약했다. 2015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자유 훈장을 받은 수학자 캐서린 존슨(98), ‘흑인 컴퓨터’의 리더이자 IBM 컴퓨터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1910~2008), 흑인 여성 최초의 우주공학 엔지니어 메리 잭슨(1921~2005)이 바로 그들이다.
실화 소재 ‘히든 피겨스’ 23일 개봉
갖은 차별 딛고 NASA에서 활약
우주선 궤도 계산할 수학 공식 발견
반 세기 만에 공로 인정, 훈장 받은
캐서린 존슨 등의 인간 승리 그려
자매애의 놀라운 힘
성차별, 인종차별 이중고 속에서 이 여성들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캐서린 존슨을 연기한 타라지 P 헨슨은 “흑인 여성에게 팍팍한 시대라, 누군가 성공하지 못하도록 서로 끌어내려도 모자란데 이들은 경쟁하지 않고 상대방을 기꺼이 끌어올려줬다”고 했다. 예컨대 캐서린이 NASA의 핵심인 ‘스페이스 테스크 그룹’에 들어간 건 도로시의 추천 때문이었다. 이들은 동료의 능력을 믿고 지지했으며 차별에 가로 막힐 때마다 서로 위로하고 함께 극복하려 했다. 일하는 여성의 우정, 자매애, 팀워크, 연대를 긍정적 시선으로 그린 것은, 남성 서사가 주류인 한국 영화계에도 필요한 덕목이다.
여성이 발굴하고, 여성이 제작했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도 여성의 손길과 연대가 있었다. 이야기의 첫 발굴자는 에세이 『히든 피겨스』(동아엠앤비)의 저자인 흑인 여성 작가 마고 리 셰털리다. 아버지가 NASA 직원이었던 그는 아버지를 통해 캐서린 존슨을 알았고, ‘이들의 이야기가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는 ‘흑인 컴퓨터’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폭넓은 조사를 시작했다. 셰털리 작가의 조사에 촉을 세운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여성 영화 제작자 돈나 지글리오티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 등을 만든 베테랑 제작자는 에세이가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화를 결정하고, 여성 작가 엘리슨 슈로더에게 각색을 맡겼다. NASA 프로그래머 출신 할머니를 둔 슈로더는 자신의 NASA 인턴 경력을 살려 지적 호기심과 휴머니즘을 두루 채울 수 있는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오스카 수상자인 옥타비아 스펜서가 도로시 본에 캐스팅되면서 영화 제작은 본 궤도에 올랐다. 특히 이 작품은 할리우드에서도 그 숫자가 3%에 못미치는 여성 카메라 감독(맨디 워커)이 찍어 화제가 됐다.
‘히든 피겨스’의 히든 피겨스
세계적인 팝스타인 퍼렐 윌리엄스는 이 영화의 진짜 히든 피겨스다. 제작자이자 음악감독을 맡았기 때문. 평소 여성의 삶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어온 그는 “흑인 여성들이 과학자, 수학자, 엔지니어로 나오는 영화가 없었고, 그게 슬픈 현실이었다”며 “그만큼 책임감을 느꼈고, 이제 여성이 합당한 대우와 인정을 받고,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제작에 참여했다. 영화음악계의 거장 한스 짐머, 벤자민 월피시와 공동 작업한 음악도 발군이다. 이 작품이 흑인 수난사가 아닌 인권 쟁취의 승리사로 완성되는 데에는 흥겹고 경쾌한 음악이 한 몫했다.
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