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쩍새가 처음 울던 날 밤이면, 어머니는 “애들아 내일 아침에 변소에서 쪼그리고 앉아 어젯밤에 소쩍새가 처음 울었지, 하고 기억해낸 사람은 영리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화장실에서 소쩍새의 첫울음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늘 화장실 문을 나서며 ‘아차! 어젯밤에 소쩍새가 처음 울었지’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소쩍새가 울면 땅속에 있는 뱀이 눈을 뜬다고 했다.
봄은 그렇게 온다. 응달지던 뒤란에 햇볕이 들이치고 잔설이 녹아 앞 강 강가에 버들가지가 피어나면 깊은 물 바위 속에서 겨울을 지내던 물고기들이 풀려나왔다. 어디선가 개구리들이 울고, 산은 어제 보았던 그 산이 아니다. 그러다가 보면 어느새 봄은 성큼 다가와 텃밭 양지쪽에 작은 풀꽃이 피어난다.
[작가여행지 ③ 김용택의 섬진강] 우리들의 그 어떤 날에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 꽃 보러 간 줄 알아라
졸저 ‘봄날’
섬진강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구례는 해와 달과 바람이 머문 고을이다. 바람과 물과 들과 산이 가득한,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고을이다. 구례부터 하동·광양까지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 강가에 꽃구름이 둥둥 뜬다. 섬진강 하동포구 칠십리 길은 꽃길이다. 구례 지나 하동·광양 가는 길 양쪽 골짜기 매화꽃을 보지 않고 어찌 꽃을 이야기하랴. 꽃잎이 흩날리면 강물은 꽃잎을 받아 싣고 흐른다. 구례·하동·광양까지 가는 길에서 그대들은 몸도 마음도 어디 둘 데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 끝에 서면 사람들은 말을 잃는다.
산벚꽃 흐드러진
저 산에 들어가 꼭꼭 숨어
한 살림 차려 미치게 살다가
푸르름 다 가고 빈 삭정이 되면/하얀 눈 되어
그 산위에 흩날리고 싶었네
졸저 ‘방창’
그래도 우리들의 그 어떤 날 섬진강에 봄이 오고 꽃이 피니 그 얼마나 안심인가. 산은 서서, 강은 흐르며 우리더러 꽃이 되라하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김용택 시인
작가 약력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1982년 ‘섬진강’으로 등단.
시집 『섬진강』『맑은 날』『누이야 날이 저문다』『그리운 꽃편지』『강 같은 세월』『울고 들어온 너에게』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