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에 공을 들여온 북한은 정작 가결 이후엔 속도조절에 나선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태도를 두고 “엄청난 후폭풍을 우려한 때문”(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이란 해석이 나온다. 노동당과 군부의 엘리트 세력들은 물론 주민들까지 “자유민주 국가인 남조선에서는 대통령도 잘못하면 인민들에 의해 탄핵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되는 상황을 북한 당국이 우려한 때문이란 얘기다.
이런 위기감은 북한 관영매체들이 석달 넘게 탄핵 사태 보도를 이어오면서 점차 커졌다고 볼 수 있다. 백만명 규모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최고지도자와 집권당의 부패와 실정(失政)을 성토하는 모습이 북한 주민들에게 미칠 부작용을 부담스러워 했을 것이란 점에서다. 정부 당국자는 13일 “2010년 튀니지에서 촉발돼 아랍 국가 등을 휩쓴 재스민 혁명을 가까스로 차단한 북한 정권으로서는 위기감이 클 수 있다”고 말했다.
거친 표현으로 비방 퍼붓다 돌변
“남한에선 지도자도 잘못하면 축출”
주민들 동요할까 속도조절 나선 듯
북한은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각사태 때는 “탄핵 저지투쟁에서 승리했다”며 반색했다. 그리고는 “이런 기세와 기백으로 미국의 군사적 강점과 식민지배를 끝장내기 위한 반미·결사항전에 나서야 한다”며 대남 선동을 펼쳤다. 이번의 경우 남한 내 보수층을 정조준하고 나섰다. 13일자 노동신문은 ‘끝까지 청산해야 할 반역무리’란 기사에서 “괴뢰 보수정권과 역도의 졸개들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태를 남한 내 반(反)보수 분위기 조성에 적극 활용할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거친 표현들 속에서는 지난 9년간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깐깐한 대북정책과 대북압박에 시달린 것에 대한 앙갚음이 배어있는 듯하다.
대통령 탄핵 결정이 나오던 시간, 북한 김정은은 평양의 백두산건축연구원을 방문했다. 2012년 집권 이후 몰두해온 평양시 초고층 빌딩 건축과 강원도 원산 마식령스키장 등 체제선전성 시설물을 도맡아 설계해온 곳이다. “노동당이 맡긴 설계과제를 훌륭히 수행했다”며 만족스런 웃음을 보인 김정은의 모습은 이튿날 노동신문 1면을 장식했다. 하지만 지금 김정은이 처한 상황을 볼때 고민거리 또한 적지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촛불을 즐기고만 있을 때가 아니란 얘기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