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창구에서 통장이나 카드를 새로 만들 때 직원이 종이서류를 내밀며 흔히 하는 얘기다. 수십장의 신청서와 동의서 내용을 읽을 겨를도 없이 기계적으로 서명을 하다 보면 진이 빠진다. 은행 직원은 혹시 실수로 빼먹은 서류는 없는지 챙기느라 바쁘다.
신규 고객 종이통장 9월부터 없애
60세 이상이나 본인 희망 때만 발행
신한, 오늘부터 디지털 창구 도입
문서 대신 태블릿PC에 자필 서명
신한은행은 지난해 말부터 일부 지점에서 디지털창구를 시범 도입해 운영해왔다. 이 은행 스마트혁신센터의 한동영 부부장은 “고령층은 종이를 선호할 줄 알았는데 대부분 스마트폰에 적응한 데다 태블릿PC는 글씨를 크게 확대할 수 있어서 오히려 반응이 좋았다”며 “영업점 직원도 불필요한 업무가 줄어서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시범운영 수준으로 디지털창구가 이용된다면 영업점에서 연간 절감되는 종이는 1600만 장, 약 6억원 어치에 달한다. 여기에 전국 영업점이 매일 행낭을 통해 서울 본점의 문서관리팀으로 종이서류를 보내고 이를 일일이 스캔해서 창고에 보관하는데 드는 비용까지 대폭 줄일 수 있다.
은행권의 페이퍼리스(paperless) 사업은 MB정부 때인 2011년 ‘녹색성장’의 일환으로 적극 추진됐다. 전체 인쇄용지 연간 사용량의 5분의 1인 71억 장을 금융권에서 사용할 정도로 금융회사의 종이 소비량이 많기 때문이었다. 은행권만 한해 25억 장, 영업일 하루 평균 1000만 장이다. 당시만 해도 전자서명이 가능한 태블릿PC는 200만원이 넘는 고가여서 실제 도입은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기기 가격이 떨어지면서 각 은행이 도입에 속도를 내게 됐다.
은행에서 사라지는 종이는 서류만이 아니다. 종이통장도 사라진다. 이미 각 은행은 종이통장 없이 전자통장에 가입하면 우대금리나 창구 수수료 면제 등의 혜택을 주고 있다. 가급적 종이통장을 발행하지 않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종이통장 제작원가는 300원 내외지만 인건비나 관리비까지 붙이면 5000~1만8000원이 든다. 지금은 통장을 신규로 발행할 땐 무료, 분실로 인한 통장 재발행은 2000원의 수수료를 매긴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통장 분실·훼손을 이유로 통장을 재발행하는데 연간 약 60억원에 달하는 수수료를 지급하고 있다.
그래서 금감원은 이미 2015년 단계적으로 종이통장을 감축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오는 9월부터는 신규 거래고객은 원칙적으로 종이통장을 발행해주지 않는다. 고객이 60세 이상이거나 고객이 종이통장을 희망하는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종이통장을 만들어준다. 또 2020년 9월부터는 종이통장을 달라는 고객에게는 통장발행 비용 중 일부를 부과토록 할 예정이다. 다만 종이통장에 익숙한 고령층이 막연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60세 이상인 고객은 계속 예외로 두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 종이통장이 발행되기 시작한 건 1897년 최초의 상업은행 ‘한성은행’이 설립된 때부터다. 120년 만인 올해부터 종이통장이 역사 속으로 퇴장을 시작하는 셈이다. 다만 아직도 신규 거래 계좌의 70% 정도가 종이통장이 발행된다는 점에서 다소 급격한 변화라는 지적도 나온다. 금감원 은행감독국 박범준 팀장은 “2020년부터 종이통장 발행에 고객 부담이 늘어나는데 대한 불만 여론이 일부 있는 건 사실”이라며 “시행을 앞두고 이런 점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