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자오는 1921년 12월 안후이(安徽)성 쑤청(宿城)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리수슈(李淑秀). 39년 공산당 근거지였던 옌안(延安)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다. 이 때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 조직부장이던 후야오방과 교제를 시작해 41년 결혼했다.
후와 리는 결혼 전 ▶먼저 뜻이 맞아야 한다, ▶가정을 이룬 뒤에도 공동의 사업을 잊지 않는다, ▶엄준한 시험을 견디며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돕고 격려한다는 약법삼장을 맺었다고 알려진다. 이들은 슬하에 개혁성향의 이론지 옌황춘추(炎黃春秋)의 후더화 전 부사장 등 3남 1녀를 뒀다.
리자오는 49년 신중국 성립 이후 베이징시 방적공업국 당서기를 역임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후야오방은 중앙조직부장에 취임해 문혁 기간 동안 억울하게 자본주의 추종자(走資派)로 몰렸던 이들을 복권시키는 업무를 담당했다. 이때 리자오는 남편 업무를 도와 억울한 이들의 사연을 접수하는 창구 역할을 도맡았다.
89년 4월 15일 후 전총서기가 심장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후 후야오방 추모 활동은 89년 민주화 운동과 6·4 천안문 참극의 도화선이 됐다.
11일 리자오의 부고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 사회관계망(SNS) 사이트에는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가 춘제(春節·설)를 맞아 리자오에게 문안 인사를 한 사진이 퍼지는 등 추모 열기가 번지고 있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