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서소문 포럼] 공갈 또는 뇌물,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중앙일보

입력 2017.03.09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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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사회2부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특별검사팀 공소장에는 ‘대통령과 최서원(최순실)은 피고인 이재용에게 요구하여 뇌물을 수수하기로 공모했다’는 표현이 여섯 차례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두 사람의 공모 행위는 네 차례 있었다. 최초는 2014년 9월 초순의 일이었다. ‘이 부회장에게 삼성그룹이 대한승마협회 회장사를 맡아 정유라씨의 승마 훈련을 위한 경제적 지원을 해 달라고 요구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적혀 있다. 공소장에는 그달 15일에 대구에서 열린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에서 대통령이 이 부회장에게 대한승마협회 회장사를 맡아 주고 승마 유망주들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고, 이 부회장이 수락했다고 기록돼 있다.

특검, “2014년 9월에 삼성과 대통령 문제 시작” 판단
정권 초기 CJ 수사에 이 사건 복선 깔려 있었을 수도

그 뒤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두 차례 독대(2015년 7월 25일, 2016년 2월 15일) 직전에 정유라씨 지원과 미르·K스포츠 재단에 대한 출연 요청 등을 대통령과 최씨가 공모했다는 내용이 공소장에 나온다.
 
훗날 누군가가 박영수 특검팀 수사 기록을 토대로 역사책을 쓴다면 그 시작은 2014년 9월 대통령과 최씨가 삼성 돈에 욕심을 내는 장면일 가능성이 있다. 삼성과 대통령이 얽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실한 책이 되려면 출발점을 16개월 정도 앞당길 필요가 있다.
 
2013년 5월 초 박 대통령의 방미 때 경제사절단에서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제외됐다. 그리고 그달 21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CJ를 압수수색했다. 41일 뒤인 7월 1일 이재현 회장은 탈세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그 다음달에는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 CJ 측에 이재현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 부회장을 퇴진시키라고 요구했다. 9월에는 국세청 조사4국이 CJ 특별 세무조사를 시작했다. 버티던 이 부회장은 외국으로 떠났다. 당시 재계에서는 이재현 회장의 이명박 정부 실세들과의 친분, CJ가 투자한 영화나 계열 방송사 오락프로그램의 삐딱함 때문에 ‘대통령에게 찍혔다’는 얘기가 돌았다. 특검팀의 ‘블랙리스트’ 수사에서 “대통령이 ‘CJ그룹의 영화 및 방송 사업이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말을 했다”는 관련자 진술이 나오기도 했다.


CJ가 정권의 표적이 된 이유가 진정 이전 정권과의 문제나 영화·방송 때문이었을까. 검찰과 특검팀의 수사에서 이런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박영수 특검은 지난 3일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기자단과의 오찬 자리에서 “박 대통령을 조사하게 됐다면 왜 그토록 CJ를 미워했는지 꼭 물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3년 봄 검찰 특수부의 이재현 회장 수사는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현직 검찰 고위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특수2부가 CJ 수사를 하겠다고 했다. 대검 중수부가 해체될 때 보관해 놓은 수사자료가 있다고 했다. 총장을 비롯한 검찰 수뇌부는 내켜 하지 않았다. 4대 강 수사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수사에 특수2부 검사까지 투입할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한 달이면 끝낼 수 있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결국 총장이 승인했다”고 말했다. 정권 차원에서의 하명 수사는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특수2부가 누군가를 통해 정권의 의중을 읽었거나, 아니면 특수부 검사의 수사 욕심이 발동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CJ 수사팀은 특이한 책 한 권을 갖고 있었다. 『묻어둔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맹희 전 CJ 명예회장(2015년 작고) 회고록이었다. 1993년에 출간된 이 책의 상당 부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 비판에 할애돼 있다. 부친인 이병철 회장이 박 전 대통령을 겨냥해 강도 높은 비난을 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수사팀에서는 “박 대통령이 예전에 이 책을 읽고 격노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수사는 힘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나왔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손자다. 사촌 형 이재현 회장과 사촌 누나 이미경 부회장이 겪은 일을 지켜봤다. 만약 내가 그였다면 청와대나 최순실씨가 금전적인 지원을 요구하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을 것 같다. 뇌물인지 공갈(강요)에 의한 편취인지는 이제 법정에서 판가름 날 일이 됐지만 ‘공포 정치’가 있었던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상언 사회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