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고는 신입생 180여 명을 포함해 전교생이 580여 명인 51년 된 일반 남자고등학교다. 전국 5566개 중·고교 중 유일하게 국정 역사 교과서 연구학교를 희망해 ‘이념의 화약고’가 됐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촛불과 태극기의 대립 같은 ‘극단적 진영 논리’의 축소판이 된 것이다.
자유주의·패권주의 충돌한 문명고
5566개 학교 중 1개도 포용 못하나
전교조·민노총의 철회 겁박은 폭력
‘포용력 제로사회’선 민주주의 퇴보
우리 헌법 31조(4항)는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계·사회단체·정치권은 이런 가치를 훼손하며 갈등과 분열만 조장한다. 역사 교과서가 꼬인 데는 물론 정부 책임이 크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면 운동장을 잘 다져야 하는데 골대(국정 발행)를 옮기는 바람에 이념 진지전(陣地戰)만 더 치열해졌다. 논란 속에 교육부가 44억원을 들여 만든 국정교과서는 균형성·객관성·적확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문명고 또한 교과서를 선정할 때 깔끔하지 못한 절차상 문제로 빌미를 제공했다.
하지만 국정화 문제와 문명고 사태는 별개다. 민주주의 교육은 다양성·다원성·자율성이 생명이다. 그런데 진보·보수 측은 그런 점을 무시하고 자기들만 옳다는 진영 논리에 빠져 ‘포용력 제로’의 양극단 불신 사회를 조성하고 있다. 물론 광복과 한국전쟁·독재정권, 그리고 근대화·산업화·민주화 과정으로 이어진 우리의 굴곡진 역사에 대한 해석은 다를 수 있다.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랑케의 ‘사실과 객관으로서의 역사’와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카의 ‘해석과 주관의 역사’에 대한 개념 충돌과 각기 다른 해석이 우리 사회에 상존하는 이유이기도 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양손잡이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다원화와 자유주의가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촛불집회를 계기로 한쪽 중심의 구체제(앙시앵 레짐) 발전 모델이 붕괴되고,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면서 양자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국정 역사 교과서 사태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싶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금 중요한 것은 교육 현장의 혼란을 없애는 일이다. 일본 정부가 초·중학교 교과서 학습지도요령에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명시하는 역사 도발까지 한 마당에 언제까지 소모적인 이념 싸움에 집착해야 하는가. 해법은 오로지 균형감과 객관성이 튼실한 최고의 콘텐트를 만드는 것뿐이다. 랑케와 카의 사관(史觀)의 조화, 그리고 진영 논리와 결별한 자유주의와 다원주의의 가치 정립이 시급하다.
그러려면 탄핵 정국과 무관하게 역사 교과서 보급 일정부터 짚어봐야 한다.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내년 2월에는 새 검정 역사 교과서를 중·고교에 넣어줘야 한다. 한데 집필 기간이 종전의 절반도 안 되는 6개월 남짓이라니 고품격·고품질 콘텐트는 언감생심이다. ‘대한민국 수립’(국정)과 ‘대한민국 수립 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검정) 등 집필기준도 논란이다.
필요하다면 역사 과목에 한해 학교 적용 시기를 1년 더 늦추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국정교과서처럼 인터넷에 공개해 국민 검증을 받도록 해야 한다.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인 만큼 서로 다른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출제 범위와 방향을 명문화할 필요도 있다. 역사 교과서를 이념이 아닌 학생의 눈으로 보면 모두 가능한 일이다. 어른들의 진영 논리가 학생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