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도깨비' 만나러 외씨버선길을 간다

중앙일보

입력 2017.03.03 00:01

수정 2017.03.0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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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주영이 '봄 여행지'로 추천한 외씨버선길 중 경북 영양을 지나는 조지훈문학길 구간의 소나무길.

경북 청송 주왕산 자락에서 나고 자란 김주영 작가는 2년 전 서울에 있던 서재를 청송으로 옮겼다. 수구초심으로 돌아와 새로운 소설을 집필하며 고향을 알리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작가 김주영은 『객주』를 쓰기위한 사전취재를 위해 2013년 네 번이나 외씨버선 길을 걸었다. 그 기억을 더듬어 우리에게 봄 여행지로 외씨버선길을 추천했다. 다음은 김 작가의 추천사. 정리=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joongang.co.kr
 

외씨버선길 이름은 조지훈의 시 '승무' 에서 따왔다.

조지훈 선생의 '승무'라는 시에서 따온 외씨버선 길은 경북 청송 주왕산이 출발점이다. 걷기를 좋아하는 여행자들에게 조차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 길은 청송, 영양, 봉화, 강원도 영월을 관통하면서 장계장 디미방 길, 오일도 시인의 길, 조지훈 문학길, 보부상길, 김 삿갓 문학길, 관풍헌 가는 길까지 모두 합치면 모두 240㎞가 넘는 길고 긴 여정의 옛 산길로 이루어 졌다. 동해안에 나열되어 있는 호사스런 관광지들을 바로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들과는 매몰스럽게 등 돌리고 앉아 있음이 이 길이 가진 으뜸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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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의 출발점에서부터 영월의 최종점까지는 대낮에도 도깨비가 나타날 것 같은 정적이 감돈다. 산코숭이를 돌 때마다 앞을 가로 막는 적막함에 자신의 발짝 소리에도 놀랄 정도다. 울창한 노송 길 사이로 화살처럼 내려 꽂이는 아침의 햇살, 해질녘이면 계곡 길 갈대숲에서 들리는 길고 긴 휘파람 소리, 산기슭 속에 숨어 있는 그림 같은 뜸마을, 민박집 문풍지 소리 같이 잃어버린 옛 소리들에 어딘가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길이다. 보약 같은 수면을 불러들이는 녹작지근한 피로를 단숨에 풀 수 있는 길, 정치적인 전란을 호되게 겪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기름지게 가꾸겠다고 떠들어 대는 불상놈들의 고함소리와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어 좋은 길이다. 
 

외씨버선길 경북 봉화 금강소나무숲길.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득하다.

옛 이야기 속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산적이 불쑥 나타날까 해서 심약한 사람은 3~4명의 동반자가 있어야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특히 울진과 봉화를 잇는 열 두 고개의 보부상길이 그렇다. 너와 지붕으로 올라간 낮닭이 길게 목청을 뽑아내는 초현실적 적막감에 넋을 빼고 서 있는 내 자신을 문득 발견하는 기회를 외씨버선 길은 심심찮게 제공한다. 그처럼 이 길은 우리들이 갖는 통상적인 시간 계념 속에 배속되어 있는 길이 아니다. 이 길을 걷는 동안은 우리는 벼랑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수도사가 된다. 외씨버선 길 사이에는 아래로 내려다보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깊은 낭떠러지 길이거나, 절벽을 부등 켜 안고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하는 벼룻길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예전 울진에는 토염이라는 좋은 소금이 났다. 보부상들은 이 소금을 지고 십이령길을 넘어 봉화의 장에 내다팔았다. 보통 경상도의 소금은 낙동강을 따라 배로 수송하지만, 갈수기와 홍수 때는 배가 드나들지 못했다. 보부상들은 이 때를 노려 내륙으로 소금을 수송해 비싸게 팔았다. 4년 전이다. 『객주』10권을 완성하기 위해 울진에서 봉화를 잇는 십이령길을 세번 걸었다. 가는 데 2박3일, 오는 데 2박3일 걸리는 길이다. 이 곳은 궁궐을 지을 때마 밸 수 있는 금강소나무가 자라는 곳이다. 걸은 멀고 힘들었지만 걷는 내내 소나무숲에 경도됐다. 이 길을 걷고 나서야 비로소『객주』를 완성할 수 있었다.” (김주영)

이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여행자는 우선 행구를 챙긴다. 그러나 과 부하된 여행 장비는 이 겨울 산길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치받이 길을 오를 뗀 후회막급이다. 호의호식하고 싶다는 욕심만 버린다면 이만한 관광코스가 이 나라에 따로 없다. 제주도 해변을 일주하는 올레길이나, 영덕 강구에서 시작해서 강원도 낙산에서 끝나는 동해의 해안 도로를 걸어 본 여행자라면 이 말에 선뜻 동의하리라 믿는다. 
 
그 중에서 청송과 봉화에서 곧잘 만나게 되는 솟을 대문(지붕이 담 위로 우뚝 솟아 있다고 솟을 대문이다)이 있는 종택이나 고택에서 지낸 하룻밤은 기억에서 진작 사라지지 않는다. 청송의 송소 고택과 봉화의 만산 고택, 기헌 고택, 권진사댁 같은 고택에서의 민박 체험을 비롯해서 외씨버선 길 주변에 흩어진 여러 고택에서의 깊은 수면으로 하루의 여정에서 얻은 피로를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다. 송소고택 코앞에 있는 <심 부자 밥상>은 예약만 해두면 놋그릇에 정성스레 담아 맛깔스런 아침 밥상을 즐길 수 있고, 여름날의 만산 고택에서는 탁 트인 대청마루에 누워 밤벌레 소리 들어가며 잠들 수 있다. 
 

외씨버선길 중 조지훈문학길. 한 여행자가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아니면, 골짜기 마다 아담하게 들어앉은 산촌 마을로 찾아들면, 벗어둔 신발을 밤새 똥개가 물어 개울가에 내버린다며 방안에 넣어주는 민박집 아낙네의 섬김을 받을 수 있다. 그 민박집에서 먹는 뜨겁고 걸쭉한 시래기 국과 오래 묵어 칼칼한 된장 맛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와락 떠올리게 만든다. 

김주영이 『객주』쓰려고 걸은 그 길

지친 삶을 위로 받고 싶다면, 선조들의 가쁜 숨결이 켜켜이 배어 있는 외씨버선 길을 걷기다. 두고 온 것과의 끓임 없는 연락은 아예 단념하는 온전한 휴식을 작정하지 않으면 발 들여 놓을 곳이 못된다.

김주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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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약력
1939년 경북 청송 출생
1971년 소설 『휴면기』로 등단
장편소설 『객주』1~9권 출간, 2013년 10권 완결. 
1998년 소설 『홍어』출간
현재 파라다이스문화재단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