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중앙 3월호]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아내 민주원

중앙일보

입력 2017.03.01 10:00

수정 2017.03.01 10:56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함께하던 정치적 동지. 다시 태어나면 “안희정이 아내, 내가 남편으로 성별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 좋은 말로 꾸며내지 않아도, 안희정이라는 사람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 민주주의를 공약으로 내건 대선 주자 안희정의 아내, 이름도 민주원(53)이다. 

[여성중앙 3월호]



화장기 없는 얼굴, 딱 봐도 170cm는 족히 넘는 큰 키, 굽 낮은 구두에 바지 정장을 입고 뚜벅뚜벅 걸어와 조용히 인사를 건네는 그녀. 안경 너머로 눈빛이 인상적인 그녀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아내 민주원씨다. 
관련기사

가족 여행 갔을 때(2006)[여성중앙 3월호]

안희정과는 고려대 83학번 동기로, 학교 도서관 맞은편 자리에서 우연히 처음 만난 둘은 그 후 6년을 연애하고 자연스레 결혼에 골인했다. 그녀의 남편 안희정은 대학 재학 중 학생운동을 하다 안기부에 체포돼 10개월 수감, 이듬해 통일민주당 김덕룡 의원실에서 일하며 정치판에 뛰어들었고, 노무현 의원을 돕는 일을 시작해 결국 노무현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일조를 했다. 


하지만 불법 대선 자금의 책임을 지고 1년을 감옥에서 살고, 출소 이후 참여정부 임기 동안 어떤 직도 맡지 않고 재야에 묻혀 지냈다. 그러다 2010년 충남도지사에 출마해 당선, 재선까지 성공했고 지금은 드디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사이에 아내 민주원은 아들 둘을 낳았고, 남편이 감옥에 갔을 때나 일을 못 하고 있을 때 고등학교 교사(사회 과목)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다. 남편이 충남도지사가 됐을 때는 ‘도지사 사모님’으로서 드러내놓고 활동하기보다는 혼자 묵묵히 할 수 있는 일들을 조용히 해왔다. 


심리학(예술치료학) 석사를 따고, 필요한 곳에 가서 아이들의 심리 상담을 했다. 앞으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꾸준히, 조용히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녀. 민주원은 질문을 던지면 자주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조리 있게 답했다. 동지이자 부부, 두 남녀는 참 많이 닮아 있었다. 


큰아들 유치원 행사 때.엄마 대신 간 아빠 안희정(2001)[여성중앙 3월호]



안희정 지사의 지지율이 ‘잠룡’에서 ‘2위’로 훌쩍 뛰었어요
남편은 국민이 자기 마음을 좀 알아주시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사실 안희정에 대해 잘 몰랐잖아요.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자기 마음과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얘기들을 좀 이해해주시는 것 같아서 기쁘고, 다행스럽다고. 이제 더 이상 싸우다 해가 지는 나라가 아닌 나라를 좀 만들고 싶다고. 이대로 쭉 더 올라서 그런 소망이 좀 이뤄졌으면 한다고 얘기해요. 


정치인의 아내가 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제 경우는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예요. 남편이 워낙 힘들어했기 때문에 같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걸 견뎌내는 것, 받아들이는 것, 이 과정이 너무 힘들었죠. 남편이 정말 힘들어했거든요. 49제 내내 봉하(경남 봉하마을)에 있었으니까. 저도 자주 내려가고 했는데, 그 기간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슬픔, 애도 같은 건 결국 받아들이는 과정이니까. 받아들이지 못해서 힘든 거고. 받아들이고 나면 또 한 고비를 넘어가는 거겠죠. 영영 잊을 순 없으니까…. 


본격적으로 대선 행보를 하는 있는 안희정 지사를 보며 ‘내가 알던 남편의 모습이 맞나’ 싶은 순간들은 없었나요 
어유~, 요새 많아요(웃음). 쇼 프로그램 같은 데 나올 때 ‘저런 모습이 있었나?’ 굉장히 낯설고 신기해요. 사람은 사실 상 다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표출되면서 계발되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은 늘 책 보고, 이성적인 것들, 주로 좌뇌만 쓰던 사람이었거든요. 근데 요즘에는 예능 프로그램 나가서 막 웃기기도 하고. ‘이제야 그런 능력이 계발되는 구나’ 하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대학 도서관에서의 첫 만남으로 유명하잖아요. 안희정이라는 남자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처음에 딱 봤을 때는 ‘무슨 남자가 저렇게 허옇지?’ 그랬어요. 정말 흰벽처럼 말이죠. 그때 검정고시 보고 대학 오느라고 앉아서 공부만 하느라 햇빛을 못 봐서 그랬대요. 뭐랄까, 좀 유약해 보였다고 할까요?(웃음) 


언제쯤 남자로 다가오던가요 
2학년 때 만나서 그냥 친구였다가 한 3~4학년되니까 좀 남자 친구 같았어요. 사귀자는 말은 따로 안 했고, 수업을 같이 듣고 얘기를 많이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게 1984년도인데 지금까지 살고있네요(웃음). 6년 정도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프러포즈 같은 것도 안 했어요. 그냥 ‘이렇게 오래 사귀었으면 결혼하는 거 아닌가?’ 했죠. 제가 이벤트같은 것에 둔감해서 서운한 감정도 없었어요. 오래 사귀었고 서로에게 다른 사람 나타나지 않았고 그러면 결혼하는 거지 뭐, 그렇게 생각했죠(웃음). 


안희정이라는 남자의 어떤 점이 좋아 보였나요 
생각이 반듯했어요. 마음이 따뜻하고 똑똑해 보이고. 말도 잘 통하고, 지향점도 같아 보이고, 가치관도 비슷해 보이고. 그때는 그런 점들이 눈에 들어왔죠. 같이 학생운동을 했으니까. 

작은아들 돌 때 찍은 가족사진(1997)

정치적 동지였지만, 결혼하고서는 아이 둘 키우면서 교사로 일하고,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 했을 때 내 주체성을 잃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고요 
남자애 둘을 돌보고,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시댁과 친정도 다 멀리 있어서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남편은 일한다고 집에 안 들어오고, 그걸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려고 했으니 너무 힘들었죠. 사실 싸웠어야 하는데, 싸워서 잘잘못을 따지는게 아니라 부부가 같이 해야 하는 영역이잖아요.

요새 저한테 너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단어가 있는데, ‘독박육아’예요. 그게 제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부가 같이 얘기하면서 분담하고, 같이 해결해야 하는데 이 사람은 그냥 바깥일만 하고 다니고, 안에 것은 내가 혼자 다 책임져야 하는데 잘 안되니까 다 내 탓인 것 같아서 자책했죠. 이제는 세월이 흘러서 내 탓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지만, 그때는 내가 무능력해서 그런 것 같았거든요. 명확하게 문제가 뭔지도 잘 몰랐던 거예요. 그러니까 남편한테 “일찍 좀 들어와라, 일주일에 두 번만 애들하고 밥 좀 같이 먹자” 그 정도 요구만 했던 거죠.

“다음 생은 내가 남편, 안희정이 아내로”

아이들한테는 어떤 아빠였나요 
감옥 갔을 때를 기준으로 좀 달라졌어요. 애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이 바쁘고 일에 몰두하다 보니 아이들하고 놀아줄 시간 자체가 부족했어요. 근데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한 5년을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그때 그동안 못 놀아준 거 다 놀아준 것 같아요. 애들 학교에도 가서 학부형 노릇 열심히 하고, 애들하고 여행도 가고. 그전에 비웠던 시간들을 그렇게 많이 메웠죠. 

작은아들이 2개월쯤 됐을 때,우유 먹이다 졸다 하는 안희정(1996)[여성중앙 3월호]



그러다 충남도지사에 선출됐죠. 도민들에게 인정받아서 재선도 됐고요. 에서 지켜보기에 도지사로서 어떻던가요 
오늘날의 안희정과 연결된 게 뭔가 하면, 도지사 일정표를 보면 오전에는 자유총연맹 가서 축사를 하고, 오후에는 참여연대 가서 기념사를 해요. 다음 날 오전에는 한국노총 충남지부, 오후에는 기업인협회 가서 격려사를 하고요. 어떻게 보면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단체들이잖아요. 근데 막상 가서 보면 관점이 다를 뿐이지 거기 속한 사람들은 다 우리 부모님, 이모나 삼촌 같은 국민이란 말이죠.

처음에는 그걸 
힘들어했어요. 남편이 나름 진보 쪽에서 도지사가 된 사람인데 자기 입장만 가지고 설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잖아요. 이들의 위치가 서로 다른데, 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그런 심리적 갈등 속에서 이 양극을 양쪽으로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안으로 모여들게 할것인가. 이런 고민을 계속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의 안희정은 이 7년의 현실 속 고민의 결과물이지, ‘이렇게 하면 표 더 주겠지?’ 하는 전략이 아니에요. 잘 모르시는 분들은 발언 속 (대연정 같은) 단어 가지고 공격하고, 표 때문에 그런다고 하시는데,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게 아니거든요.

그 과정이 
남편을 많이 성숙시킨 것 같아요. 관념적이지 않고 실질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허구는 걷어내고 정말 도움 되는 정책이나 방안들은 가져오겠다는 게 도정 경험 속에서 찾은 결과물인 거죠. 그걸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끼리 계속 싸워야 되잖아요. 


대선 나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당황스럽고 놀라고,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내가 왜 겁이 날까, 무엇에 대해 두려워하지?’ 생각해보니 경쟁하는 과정에서의 분열이 결과로 나타날까 봐, 우리끼리 싸우다 분열될까 봐, 그걸 무의식적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더라고요. 그 마음을 남편한테 말했더니 “상대방을 없애버리는 경쟁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경쟁도 있다.

민주당 내에서 경쟁을 통해 좋은 후보가 선택되어야 발전이 있
는 거다”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세포는 분열이 돼야 성장하잖아요. “성장을 위해서 겪어야 하는 과정으로 생각하자. 분열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정 그렇다면, 하고 싶으면 해야죠. 그게 지난가을이었네요. 

소외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만약에 그게 된다면 좀 더 좋은 위치에서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계속 고민을 하는 거죠


평상시에도 정치적 이슈나 사회 돌아가는 일에 대해 부부가 자주 얘기하는 편인가요
맨날 그 얘기죠. 앉으면 그 얘기. 남편은 안과 밖의 구분이 없이 일관되게 늘 바깥 얘기를 해요. ‘기승전-정치 역사적 현안 문제’. 늘, 항상, 30년을 일관되게. 그러다 보니 옆에 있는 저는 지칠 때가 가끔 있는 거고요(웃음). 이 사람에게는 집도 일터인 거죠. 오로지 일밖에 없죠. 그래서 훌륭한 일꾼이 될 거예요, 아마. 공적인 일에 늘 전심전력, 심신전력, 딱 이런 사람이죠(웃음). 


안희정 지사가 페미니즘 공부를 한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두 분이 토론하거나 논쟁한 적이 있나요 
(남편이) 어디 가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물론 아주 예전 일이에요. “아내가 힘들어할 때 남편이 잘 웃어주면 된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된다.”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길래 제가 발끈해서 “당신의 웃음이 필요한 게 아니라 노동이 필요한 거다. 사랑은 노동이다”라고 말했죠. 그게 제가 결혼한 다음에 얻은 결론이거든요.

‘사
랑하면 노동하라. 노동하지 않고 웃음을 날리는 건 너무 관념적이다.’ 그렇게 한 번 말다툼을 한 적이 있어요. 남편은 제가 자기의 진심을 몰라준다며 서운하다고 하고, 전 진심을 말로 들려주지 말고 보여달라고 하면서요. “직장 생활을 하건 안 하건 여성들에게, 아내와 엄마에게 남편 사랑의 진심은 노동의 분담이다. 그래서 여자도 숨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여백을 만들어주는 게 진짜 사랑이다.” 며칠이 지나서 자기가 너무 관념적이었다고,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실질적인 도움, 나아가서 실질적인 제도로서의 도움으로 확대돼야 한다는 결론을 내면서 말다툼을 끝냈죠. 


안과 밖에서 늘 일뿐인 남자지만, 그래도 아내 앞에서의 안희정이라는 남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흠…, 인간 안희정은 정이 많고 따뜻하고 섬세하고, 때로는 예민하기도 하고(웃음), 가끔은 로맨틱한 남자죠. 본인이 여유 있을 때는 로맨틱해지기도 해요. 머릿속이 항상 무언가로 꽉 차 있으니까 로맨틱해질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지(웃음). 

가족 여행에서 두 아들과 함께(2001)[여성중앙 3월호]

‘내 남편이지만 이건 정말 인정한다’ 하는 게 있나요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봐요. 정치적인 식견이나 안목이나. 단순히 한두 개의 정책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큰길을 볼 줄 아는 것 같아요. 가능하면 많은 사람에게, 가능하면 많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가능한 길을 멀리 바라볼 줄 아는 능력도 있고, 그 길을 가려는 의지와 투지가 있고, 그 길로 다 같이 이끌고 가려는 능력, 지도력도 있고요.

정치 지도자로서의 덕목들이 나름 골고루 탑재돼 있는, 잘 들
어가 있는 종합 선물 세트 같은 느낌은 들어요. 그래서 좀 다행인 게, 만약 제가 이런 자리에 나와서 거짓말을 해야 된다면, 제가 보기에는 그저 그런데 출마한다니까 좋은 얘기만 해줘야 한다면 스스로 괴로워서 못 한다고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도 이 부분은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있기 때문에 다행이고, 믿으셔도 될 것 같아요. 

도지사의 아내로서 바깥 행사도 많이 다니고, 인사 다닐 일도 많았을 텐데, 잘 드러내놓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다녔다고 들었어요 
제가 원래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걸 낯설어하는 걸 아니까 억지로 하라는 소리는 절대 안 했고요.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만 하라고 했죠. 그래서 혼자 조용히 다녀올 수 있는 데만 찾아갔어요. 예를 들어 ‘김장 담그기’ 같은 거죠. 그건 내가 잘할 수 있고, 열심히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제가 상담 치료와 심리학, 정신 분석을 공부했거든요. 그래서 보육 시설이나 학교에서 의뢰한 정서상 어려움이 있는 어린이들을 치료하러 가기도 했어요. 센터에 오는 아이들 상담해주고. 그런 일들을 많이 했어요.


그쪽으로 활동을 계속할 건가요 
네. 저는 계속 공부도 하고 싶고, 일도 하고싶어요. 아이 상담이 중요한 게, 어렸을 때의 성격이나 정서적 부분은 평생 가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도와주는 게 아이 개인에게도, 사회적으로 봤을 때도 굉장히 필요한 일이에요. 좀 확대됐으면 좋겠는데, 비용 문제때문에 어려움이 많죠. 


영부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치가 많이 높아졌어요. 영부인이라는 위치가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도 생각하나요 
흠… 시간을 두고 계속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 같아요. 전 제가 뭐가 되든 안 되든 하고 싶은 일을,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고요. 새로운 요구에 대해서는 제가 지금 뭐라고 말을 못 하겠어요. 이런 걸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는 아직 제가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고요. 그보다는 소외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만약에 그게 된다면 좀 더 좋은 위치에서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계속 고민을 하는 거죠. 

결혼기념일 가족사진 촬영 중(2006)[여성중앙 3월호]

지금까지의 안희정에게 수고했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전한다면 
감사하게 생각하는 건 남편이 참 일관된 삶을 살아왔다는 거예요. 우리가 스무 살에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34년이 흘렀는데 그동안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 어디 휘둘리거나 꺾이거나 돌아서지 않고, 대학교 1학년 때 만나서 했던 얘기들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 삶을 보여준 게 인간적으로 참 고맙고 존경스러워요. 어떤 인생인들 어려움을 안 겪겠어요. 모든 인생은 어려움이 함께하잖아요. 그래도 변하지 않고 일관되게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앞으로 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면요 
앞으로는 일할 때 일하고 쉴 땐 좀 쉬어라. 그래야 일도 더 잘할 수 있는 거다! 


쉽게 안 고쳐지지 않을까요(웃음) 
그러니까요(웃음). 쉴 땐 쉬어야 생산력도 늘고, 건강하게 일도 잘할 수 있는 건데 24시간 일밖에 모른다니까요. 그걸 좀 고쳐라, 건강하게 살자. 그게 부탁이라면 부탁이에요. 안 달라질 거야, 근데….
 
에디터 성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