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삶의 향기] 대화의 레벨

중앙일보

입력 2017.02.28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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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런던 GRM Law 변호사

내 포켓몬고 레벨은 33이다. 이거 매우 높은 레벨이다. 그동안은 한국에서 포켓몬고 서비스가 안 되는 바람에 영 이야기할 기분이 안 났는데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에서도 이 게임의 인기는 선풍적이었다. 한동안 사람들이 손에 전화기를 들고 어정어정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멈춰서 손가락으로 전화기 화면을 휙 긁어 올리는 모습을 꽤 볼 수 있었다.

시작은 아이 때문이었다. 아이를 위해 게임에 필요한 아이템이나 몬스터를 잡아 주다가 어느덧 매우 열을 올리며 이 게임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됐다. 어느날 기차 안에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노인이 지금 하는 것이 그 포켓몬 어쩌고 하는 거냐,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 왔다. 간략히 설명해 주자 집중해 듣던 노인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내가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설명해 줬다 하더라도 그 노인에게는 똑같이 들렸을 것이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인 게다. 그러고는 웃으며 요즘은 사람들이 다들 아주 이상하다고 장탄식을 했다.

포켓몬고를 궁금해하며 웃던 영국 노인의 태도
대화·소통 위해선 타인의 선택과 취향 존중해야

저 노인 세대란 그야말로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 왔다. 컴퓨터 인터넷에 더해 문득 스마트폰이라는 물건까지 나타나더니만 급기야는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데 괴물(몬스터)이 나타났다며 멀쩡한 어른들이 전화기 화면에 코를 박고 길바닥을 헤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고야 만 것이다. 그러니 다들 이상해 보이고 못마땅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저 ‘당신들’이 이상하다는 말 속에는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섞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해할 수도 없이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선도는커녕 선뜻 어울리지도 못하고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면서 살아가야 하는 마음 말이다.

그 마음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 얼마나 궁금했으면 은근히 낯을 가리고 예의범절 따지는 영국 노인이 나에게 저런 것들을 물어볼까 싶어 마주 웃어 주고 나서 또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노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상냥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노인의 태도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만일 노인이 다짜고짜 그런 쓸모없는 짓에 왜 시간낭비를 하고 있느냐는 식의 거친 언사를 보였다면 나 역시 설명은 고사하고 다른 자리로 옮겨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요즘 세상이라는 것이 다들 같은 것을 같이 느끼고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곳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그저 시공간만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이다지도 다른 상대에게 말을 걸거나 더 나아가 무언가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하고 싶다면 예의를 챙겨야 한다. 이는 우선 대화의 기술에 해당하는 부분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고방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타인의 선택과 취향과 생각과 기타 등등, 타인을 나와는 다른 개별적 인격으로 총체적으로 존중하는 사고방식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부당함은 상대가 가족이라고 해도, 행동의 동기가 ‘선의’라고 해도 다를 바 없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한국 소설 <채식주의자>를 보면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채식주의를 선언한 주인공에게 그 아버지가 성인인 딸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폭력을 행사해 억지로 고기를 먹이는 것이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채식주의자가 되든, 같은 성별의 사람을 사랑하든, 허공 중에서 괴물을 잡겠다고 전화기 화면을 북북 문질러대든 그건 어디까지나 타인의 몫 아닌가.

그러니 지하철이나 길에서 자기 주장을 소리 높여 외치거나 특정 종교나 정치관을 강요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식의 태도는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반감만을 일으킬 뿐이다. 그게 자식과 같이 느껴져서라거나 후손들과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렇다. 사실 이쯤 되면 대화나 소통이 목적이 아니지 않나 싶어진다. 현실 공간에서뿐 아니라 SNS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태도는 비단 나이든 세대에게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하기야 예의와 존중을 습득하고 시정하기란 포켓몬고 레벨 올리기보다도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일이긴 하다.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