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은 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도 죽게 했다지만 이 현장만큼은 내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피부로 느껴보고 싶었다. 지면과 모니터만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그러나 시청역 3번 출구로 나오는 순간 호기심은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구호는 양반, ‘○○○를 처형하라’는 살의 번뜩이는 구호가 미세먼지와 함께 공기를 꽉 채웠다. 무섭다기보다, 피하고 싶은 저열한 살의였다. 성조기를 든 분들도 있었는데, 이분들에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제기했던 ‘한국 안보 무임승차론’에 대한 고견을 구할 수는 없었다. 기자임을 밝히는 순간 반말은 기본, 욕설이 절반인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서울시 도서관이며 인근 커피숍엔 태극기와 함께 초록색 술병을 든 분들이 가득하다. 이분들은 보수가 아니다. 진정한 보수는 보호하고 싶은 가치를 보호하고, 지켜야 할 자산을 지키는, 품격을 유지하는 세력이다. 그날의 광경은 보호 아닌 파괴, 품격 아닌 천박(친박 아님 주의)이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보았다. 진군가를 따라 부르던 어르신 얘기다. 그분은 말했다. “난 사실 박 대통령은 탄핵돼야 한다고 봐. 하지만 요즘 보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느낌이 들어. 억울해서 나온 거야.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태극기 집회 주최 측이 130만 명이 참여했다고 주장하니, 100번 양보해 그 숫자가 맞다고 쳐도, 그들 모두가 비상식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보수인 양 행동하며 반(反)보수적 행태를 보이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촛불도 싫지만 태극기는 더 싫다는 진정한 보수도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올봄 대통령 선거엔 꼭 한 표를 행사할 거라고 믿고 싶다.
시청역 3번 출구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선 촛불집회가 한창이었다. 그사이는 전투경찰들이 막아서 공터로 변했다. 4번 출구를 지나 공터로 향하는데 ‘덕수궁 앞 조각가 아저씨’로 알려진 조규현씨가 돌담에 남겨놓은 서각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서로 협력하며, 참사랑 실천하는 한민족 조국이어라.” 촛불과 태극기 사이, 너무도 쓸쓸한 글귀였다.
전수진 정치부 기자